1919년 상하이의 임시정부 수립에 고무된 만주의 항일독립군은 이듬해 사상 최대의 승전보를 울렸다. 청산리 대첩의 김좌진 장군(왼쪽)과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 장군(오른쪽)이 그 주역들이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11
임시정부의 초기 지도자 중 석오 이동녕, 우당 이회영, 성재 이동휘 등 여러 분이 만주의 독립군과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임정은 초기부터 비록 지휘계통으로 연결되지는 않았으나, 만주의 무장항일단체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편 만주의 항일독립군 부대들도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크게 고무되었다. 그리고 기미년 3·1봉기에 뒤이어 많은 애국청년들이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에 가담, 1919년 후반부터 독립군의 투쟁은 한층 활발하게 진행됐다. 20년(경신년) 5월말 중국 길림(지린)성 화룡(허룽)현에 있는 대한독립군, 국민회 계열의 국민군 및 군무도독부 등 세 부대가 홍범도 장군 휘하의 대한군북로독군부로 통합되어 국내침투작전을 더욱 강화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6월초 1개 소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국내에 침투해 일본 헌병 순찰소대와 조우하여 승전을 거두고 다시 강을 건너 후퇴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의 남양수비대 1개 중대와 헌병 경찰중대가 두만강을 건너 수색작전을 폈으나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무고한 양민들만 살육하고 돌아갔다. 독립군은 매복작전으로 철군하던 일본군을 기습공격해, 일본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고 후퇴했다. 일제는 다시 1개 대대를 투입해 봉오동에 있는 독립군을 향해 정면공격해 왔으나 여기서도 독립군의 매복 포위전술로 크게 패하고 도주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봉오동 대첩’으로 당시 상하이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을 보면, 일본군 100명 이상이 전사했으며 200명 이상이 다쳤다고 한다. 봉오동 전투가 있은 지 4개월 뒤 일본군은 화룡현 청산리 일대의 독립군(김좌진 장군 휘하의 북로군정서 소속. 나의 할아버지 동농은 북로군정서의 고문이었다)을 소탕할 목적으로 연대 이상의 병력을 투입하여 공격해 왔다. 독립군은 일본군을 백운평 골짜기로 유인한 뒤 매복작전으로 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시켰다. 이것이 만주 독립군 전투 사상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청산리 대첩’이었다. 만주에서 독립군이 이처럼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 사는 한인 동포들의 헌신적인 뒷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일본군은 경신년 6월의 봉오동 전투 때도 부근에 사는 우리 동포들을 학살했으며, 10월에 들어서는 청산리 토벌과 병행하여 조직적인 농촌파괴와 학살을 자행했다. 확실한 숫자는 밝힐 방법이 없으나 21년초까지 진행된 대학살에서 적어도 수만명의 한인 동포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된다. 이 사건은 ‘경신참변’으로 기억되고 있다. 37년부터 45년까지 진행된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적어도 100만명이 훨씬 넘는 중국의 민간인들을 학살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일본은 1894년의 청일전쟁 때에도 수많은 중국인을 학살했는데 그해 11월28일치 미국의 <뉴욕 월드>를 보면, 일본군은 요동(랴오둥)반도 끝에 있는 뤼순시를 점령한 다음 나흘간에 걸쳐 “비전투원·부녀자·유아 등 6만여명을 학살하였으며, 이때 살아남은 중국인들은 36명에 불과하다”는 기록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경신참변’뿐만 아니라, 1905~10년 사이 의병 토벌도 사실상 살육행위로서 전국에서 의병 15만여명이 희생된 것은 다 아는 일이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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