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7월8일 상하이에서 거행된 동농 김가진 선생의 장례식 행렬. 임시정부의 첫 국장으로 국내외의 애도 속에 성대하게 치러졌지만 그의 유해는 아직도 환국하지 못한 채 이국땅에 묻혀 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12
1922년 6월, 어머니(수당 정정화)는 다시 귀국길에 올랐다. 이번은 임정의 임무 수행이 아닌 개인 사정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동농 김가진)를 잘 모시고자 친정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두번에 걸친 비밀리의 조국 방문은 임정의 연통망을 이용하여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번째 귀국길은 사정이 달랐다. 경험이 있다는 사람의 안내로 모험을 했다가 결국 신의주에서 발각되어 며칠간 감방살이를 했으며, 서울까지 압송당한 뒤 친정의 도움으로 겨우 풀려나왔다. 두번이나 잠입했던 일은 왜경이 모르고 있었으므로, 단지 생활고 때문에 귀국한 것으로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그런데 서울에 와보니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가 어머니보다 먼저 와 있었다. 충남 예산으로 낙향한 친정에 내려가 약간의 자금을 지원받고 서울로 돌아왔을 땐 할아버지가 7월4일 돌아가셨다는 부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의 각 일간지에도 그 소식이 보도되었다.
세 가족이 상하이로 망명한 뒤 할머니는 네 자녀를 데리고 좀 여유 있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지내다가 결국 종로 체부동의 작은 집마저 팔아 생계를 잇고 있었다. 어머니가 세번째 귀국했을 때 가족들은 종로 재동에 있는 한 일갓집의 사랑채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부음을 들은 친척과 유림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분향소를 차리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마땅한 장소가 없어 어머니가 친정에서 받은 돈으로 집을 하나 빌려 어렵게 분향소를 차렸다.
분향소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왔으며 부의금도 제법 들어왔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중 일부를 떼어 식구들이 살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했다. 그리고 약간의 생활비만 남기고 중국에서의 활동에 보탤 생각에 부의금 대부분을 챙겨들고 22년 7월 중순 다시 상하이를 향해 출발했다.
어머니는 이때 시동생(용한)도 데리고 상하이로 왔다. 한달 전 비밀리에 입경하려다 체포되어 서울까지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떠날 때는 일제가 정식으로 여권까지 내주어 합법적으로 출국을 할 수 있었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통치’로 전환해, 서울 복판에 망명 거물 인사의 상청을 차리는 것까지 용인했다. 어머니를 취조하던 순사도 찾아와 분향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계속되는 간고한 생활 때문에 그 무렵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7월4일 망명생활 3년을 석달 앞두고 프랑스 조계 안에 있던 셋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임시정부는 상당히 궁핍한 상황에 있었으나, 임정이 주관이 되어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렀다. 할아버지의 장례는 곧 임시정부 최초의 국장과 다름없었다. 할아버지는 훙차오로에 있는 쉬자후이 만국공묘에 안장되었다. 그때 상하이에서 발행한 <독립신문>뿐만 아니라 <동아일보>도 장례식과 장례 행렬 사진 등을 자세히 보도했다.
할아버지의 장례가 끝난 뒤 어머니와 함께 상하이에 왔던 큰숙부(용한)는 약 한달을 머문 뒤 이내 귀국했다. 아버지(김의한)를 대신하여 장남 노릇을 맡게 됐으므로 서둘러 서울로 가야 할 형편이었다. 그리고 이때 숙모는 임신한 상태였다.
큰숙부는 귀국길에 우연히도 김상옥 의사와 같은 배를 탄 것이 화근이 되어 일경에 잡혀가 심한 고문을 받았다. 결국 전기고문으로 정신이상까지 생겨 폐인이 되어 몇 해를 지냈는데, 처갓집이 있는 경기도 여주로 내려가 요양하던 중 한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22년 가을 어머니는 네번째로 귀국길에 올랐다. 출국할 때 받은 여권이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합법적으로 여행할 수 있었다. 상하이에 돌봐드릴 시아버지도 안 계셨으므로, 친정아버지와 앞날에 관해 상의하기 위해 상당 기간 머물 예정이었다.
서울에서 얼마간 지낸 뒤 어머니는 예산으로 내려가 외조부에게 아버지와 함께 미국 유학을 갈 계획을 상의하여 승낙을 받았다. 외조부는 봄이 되면 쌀을 팔아 3000원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외조부가 23년 이른 봄(음력 2월4일) 타계하는 바람에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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