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2월18일 상하이에서 병사한 부인 최준례씨의 묘비에서 함께한 백범의 가족. 왼쪽부터 둘째아들 신(2), 김구(49), 어머니 곽낙원(66), 큰아들 인(5)의 모습. 당시 <동아일보>는 동포들이 돈을 모아 세운 빗돌에 조선어학자 김두봉씨가 비문을 지었다고 보도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13
1922년 7월 할아버지(김가진)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정정화)가 상당 기간 서울에 머물게 되자, 아버지(김의한)는 살던 집을 항일혁명투쟁의 동지이자 동향으로 절친했던 황훈 최중호와 백범 김구, 두 집 식구에게 넘겼다. 그리고 아버지는 프랑스 조계 내 포시로 아이런리(애인리)에서 무정 등 몇몇 동지들과 자취생활을 했다. 황훈의 두 아들 중 맏이는 훗날 옌안(연안)에 있는 조선의용군에서 활약했으며, 동생은 광복군에 참여해 항일투쟁을 했다. 그리고 딸은 중국군관학교를 나와 훗날 광복군에서 중책을 맡았던, 임정 제2대 대통령 백암 박은식의 양자인 박시창과 결혼했다. 박시창은 아버지의 절친한 항일동지이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운명한 곳은 프랑스 조계 안의 베레로 융칭팡(영경방)이었는데, 아이런리와 융칭팡이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어머니는 상하이에 다시 돌아온 뒤 융칭팡 옛집에 자주 들러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 부인 최준례 여사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백범의 네 식구가 그 집 3층에 살았는데, 사실은 다락방 같은 형편없는 곳으로 계단도 좁고 가팔랐다. 그곳에서 최 여사가 둘째아들(김신)을 낳게 되니 식구는 다섯으로 늘어났다. 최 여사는 그때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산후 얼마 되지 않아 계단에서 굴러 심한 낙상을 입었다. 최 여사는 외상도 문제였지만 결핵까지 앓고 있었다. 결국 장기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미국에 오래 있어 영어에 능통한 세관 유인묵의 알선으로 외국계 교회에서 운영하는 ‘훙커우 폐의원’에 무료로 입원했다. 백범은 임정 초기 경무국장에서 23년 내무총장으로 옮기었지만 이때 임정은 이미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내무총장은 임정 부서 중 가장 많은 인원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지출도 많은 편이었다. 임정의 형편이 그러하니 백범은 미주 동포들에게 부지런히 서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해야 했는데, 동포들이 많이 호응하여 임정 살림에 큰 보탬이 되었다 한다. 그렇게 들어온 돈은 백범 자신이 맡아 지출했으며, 아무에게도 보고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백범은 모든 것을 나라에 바치며 사는 사람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는 무척이나 인색했다. 최 여사가 입원한 뒤 연로한 곽 여사가 집안 살림뿐만 아니라 두 손자까지 돌봐야 하는 형편이었으므로 어머니가 틈틈이 백범 가족의 살림을 도와드렸다. 일회용 기저귀를 사용하는 요즘 젊은이들은 모르겠지만, 그때는 헌옷을 모아 기저귀를 집에서 만들어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머니가 어린 김신의 기저귀를 만들어 대기도 했다.
최 여사는 24년 1월1일 훙커우 폐의원에서 별세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침 그날 임정 어른들에게 세배를 다니기에 앞서 최 여사를 문병하러 병원에 가보니 이미 임종 직전이었다. 어머니는 연락할 길이 없어 인력거를 타고 백범이 사는 융칭팡으로 갔다. 그러나 훙커우는 일본인들의 거주지역이었으므로 백범은 부인이 입원중일 때도, 운명한다는 말을 듣고도 그곳에 갈 수가 없었다. 곽 여사와 어린 손자 둘과 함께 병원에 와보니 이미 운명한 다음이었다. 결국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분을 마지막 만난 사람이 된 것이다. 곽 여사는 아들의 독립투쟁에 부담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26년 작은손자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큰손자까지 데리고 갔다. 그리하여 혼자 남은 백범은 27년부터 임정 청사로 옮겨 기거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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