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10월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안에 있던 한인촌에서 태어난 필자의 첫돌 무렵 모습.(왼쪽) 30년 어머니와 함께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던 그의 어릴 적 이름은 후동이었다.(오른쪽)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15
일제 당시 임시정부 말고도 국내외에 여러 항일조직이 있었는데, 그중에 의열단을 빼놓을 수 없다. 1919년 11월9일 만주 지린성의 어느 중국인 농가에서 약산 김원봉 등 신흥무관학교 생도들과, 국내에서 3·1봉기에 참가했던 석정 윤세주, 상하이 지역에서 올라온 곽경 등 13명이 의열단을 결성하고, 김원봉을 의백(단장)으로 선출했다.
의열단은 20년대 초와 중반에 걸쳐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투탄 의거,’ 오성륜·김익상·이종암의 ‘상하이 황푸탄 저격 의거,’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 김지섭의 ‘도쿄 니주바시 폭탄투척 의거’ , 나석주의 ‘동척·식산은행 투탄 의거’ 등을 전개해 ‘의열투쟁’이란 새로운 항일운동 방식이 생겨났다.
의열단의 본부는 만주에서 베이징으로 옮겼다가 다시 상하이로 이전됐다. 김원봉은 의열단을 이끌면서 중국의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했다. 이때 맺은 중국 국민당 계열 동창생들의 후원이 중국에서의 활동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의열단의 활동은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수는 없었으나 겨레의 항일정신을 북돋는 동시에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효과가 적지 않았다.
임시정부 안에서도 점차 그런 방식의 투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높아졌지만 여건은 점점 나빠져 주로 참고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그 무렵인 28년 가을 상하이에서 한인이 가장 많이 모여 살던 아이런리에서 내가 태어났다. 나의 출생은 상하이 한인사회의 경사로까지 여겨졌다. 부모님과 가까운 친구들은 물론 선배 어른 중에서도 석오 이동녕, 성재 이시영, 도산 안창호, 우천 조완구, 백범 김구, 삼강 신환(신규식의 동생·본명 건식) 등 여러 분이 찾아와서 축하해주었다고 했다. 모두 ‘동농 선생 손자’의 탄생을 기뻐해준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할아버지가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회장으로 있을 때부터 동지였다. 다만 백범은 망명 뒤에 알게 된 사이인데, 생전에 할아버지를 극진히 대했으며, 후배들에게 할아버지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을 나도 들은 적이 여러 번 있다. 22년 할아버지가 별세했을 때 조의금을 받은 부의록을 몇해 전 우연히 발견했는데, 상하이에서는 20원 낸 사람이 하나 있고, 백범과 도산이 다음으로 많은 돈을 냈다. 20원을 낸 사람은 당시 상하이 한인 중에서 제일 부자인 사업가였으며, 도산은 아들이 미국의 유명 배우여서 좀 넉넉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백범은 극히 어려운 형편이었으므로 새삼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때 상하이의 한인 형편으로는 출산할 때 특별한 사정이 아니고는 병원을 찾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의 출산은 절친한 사이였던 조계진과 김혜숙, 두 분이 도왔다. 어머니도 훗날 그분들의 장남과 차남을 받았으며, 여러 이웃들의 출산 때 산파역을 했다.
조 여사는 다롄(대련)에서 왜경 손에 잡혀 고문치사당한 우당 이회영 선생의 며느리였다. 그 댁과 우리 가족의 친분은 내 세대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까지 4대째 이어지고 있다.
김혜숙 여사는 애국지사 정태희 선생의 부인으로서 간호사 출신인데, 신교육도 받았으며 영어도 상당히 능통했다. 남편이 왜경에 잡혀간 뒤 본인도 의열단 상하이지부에서 활동한 열성적 애국지사였다. 정 선생은 왜경의 고문 후유증으로 50년대 초까지 별 활동을 못하다 별세했다. 김 여사는 귀국 뒤 남편의 고향인 충주에서 살았다. 60년대 초 서울에 왔을 때 오랜만에 만난 일이 있다.
30년 여름 어머니는 여섯번째 귀국했다. 할머니가 손자인 나를 무척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5년 만에 다시 와 보니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앞서 얘기했듯이 큰숙부(용한)는 고문 후유증으로 얻은 정신이상 때문에 26년 여름 한강에 투신자살했다. 같은 해 큰고모(정원)는 결혼했으나 그 이듬해에 딸(홍은표)을 낳은 뒤 남편을 잃고 친정에 와 있었다. 겨우 스무살인 작은숙부(각한)가 사실상 가장으로 집안을 책임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것이 나의 첫번째 고국 방문인데 나에게는 물론 아무런 기억도 남아 있지 않다. 우리 모자는 31년말 상하이로 다시 돌아왔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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