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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한·중 이간질에 한방 먹인 ‘이봉창 의거’ / 김자동

등록 2010-01-24 19:04수정 2010-01-28 17:50

1932년 1월8일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 행렬에 폭탄을 투척한 이봉창(가운데) 의사의 체포 당시 모습. 마이니치신문사
1932년 1월8일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 행렬에 폭탄을 투척한 이봉창(가운데) 의사의 체포 당시 모습. 마이니치신문사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16
1931년 7월1, 2일 중국 지린성 창춘시에서 서쪽으로 3㎞ 떨어진 완바오산(만보산) 지역에서 관개용수로 공사를 하던 조선 농민과 공사 중단을 요구하는 중국 농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조선인은 한 명도 다치지 않았지만 중국인은 약간의 부상자가 생긴 그리 크지 않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친일신문 <경성일보>를 이용하여 사건을 왜곡 보도했으며, 왜경은 불량배들을 조종해 국내 거주 화교들을 폭행하도록 조장했다.

그러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민심을 진정시키고자 특파원을 파견했고, 이 사건은 일본이 중국의 주권을 무시해 일어났으며, 여기에 조선 농민이 이용당했다는 등의 사실을 밝혀냈다. 이 ‘진실 보도’에 대한 보복으로 동아일보 특파원 장덕준이 피살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일본과 중국의 국제분쟁으로 번져 국제연맹이 조사에 나섰는데 결론은 이 사건이 일본에 의해 과장됐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불량배들에 의해 화교들이 피해를 보자, 중국 거주 한인들에 대한 여론도 나빠졌다. 상하이에서도 교민들이 살고 있는 집을 비워달라는 집주인의 압박을 받기도 하였다. 일본은 두 나라 농민 사이의 사소한 분쟁을 정략적으로 이용하고자 문제를 확대시키고는 이 충돌을 문제 삼아 일본 국민인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적반하장의 태도로 중국을 압박했다.

러-일전쟁을 빌미로 요동반도에 진주한 일본군은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뒤에도 철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 20여년 동안 계속 더 많은 병력을 중국 동북지구에 불법 진주시켜 결국 일본군에서도 가장 정예부대라고 볼 수 있는 ‘관동군’까지 창설했다.

만보산 사건을 시작으로 관동군은 31년 9월18일 선양 북방 류탸오거우에서 철도 폭파사건을 조작해, 만주 전역을 강점했다. 중국에서는 이것을 ‘9·18 사변’이라고 불렀다. 중국 중앙정부는 ‘공비’(공산당 비적)를 섬멸할 때까지는 일본과의 전쟁을 피한다는 원칙에 따라 그곳에 주둔한 군벌 장쉐량에게 후퇴를 명령해, 일본은 쉽게 동북 3개성을 점령하였으며, 그 이듬해에는 내몽골 지역의 러허성까지 강점했다.

중국군의 저항이 무너진 이후에도 이 지역에 있는 우리 독립군은 얼마 동안 항쟁을 계속했으나 결국 지도자 대부분은 중국 관내(산해관 남쪽)로 이동했으며, 33년 말에 이르러 만주지역의 항일무장투쟁은 거의 일단락되게 된다. 국민당과 만주 군벌이 철수하고 한인 무장투쟁 지도자들이 떠난 후 이 지역에서는 새로운 항일무장투쟁이 전개됐다. 중국공산당의 영도 아래 동북항일연군이 조직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의 후속 참여가 거의 없어 장백산맥을 근거로 40년대 초까지 계속된 이 유격대는 결국 한인들의 부대가 되었다.

일본의 만주 강점으로 그 지역에 있던 임정 계열의 무장 조직이 와해되면서 임정에서도 의열투쟁을 도입하기로 결정했으며, 그리하여 ‘특무공작대’를 조직하는 책임을 백범에게 일임했다. 백범은 소수의 행동대원 외에 극소수의 가장 신임하는 사람만으로 비밀조직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안공근, 엄항섭과 더불어 아버지 김의한도 이 조직에 참여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32년 1월8일 애국단원 이봉창은 도쿄 경시청 정문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다. 이것이 애국단의 첫번째 거사였는데, 폭탄의 성능이 좋지 않아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의 침략행위로 반일감정이 높았던 중국의 여러 신문들은 일왕이 죽지 않은 것이 아쉽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만보산 사건으로 한인들을 적대시하던 상하이의 중국인 이웃들도 다시 가까운 친구들이 되었다. 비록 목표했던 일왕을 죽이는 데는 실패했으나 이봉창의 의거는 성공적 거사로 평가돼야 한다. 이 의거로, 첫째 국제적으로 우리의 독립 의지를 만방에 알렸으며, 둘째 우리 민족의 사기를 북돋웠으며, 셋째 한·중 두 나라 인민의 유대가 강화됐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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