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4월29일 오전 11시40분께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기념 열병식장에서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탁을 던지기 직전 일제 장교들이 도열해 있다. 오른쪽 둘째가 폭발로 부상을 입어 숨진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17
백범은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선출되기에 앞서 1922년 가을 몽양 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란 조직을 만들었다. 그 목적은 항일전의 비용을 마련하고 독립군 간부 양성을 위해 청년들을 중국 각지의 군관학교 및 군사강습소 등에 입학시켜 군사학 공부를 시키는 것이었다. 이 조직은 재정이 어려워져 28년 말 해체되었다.
이 기간 동안 백범은 민단장도 겸했으며, 임정의 재무부장을 거쳐 27년에는 국무령으로 추대받았다. 그야말로 1인3역을 맡은 셈이었다. 이렇게 임정이 창립된 최초의 6, 7년을 빼놓고 20년대 중반부터 모든 살림은 백범이 중심이 되어 움직였다. 그리고 석오 이동녕 임시의정원 의장은 언제나 백범을 믿고 밀어 주었다. 그러면서 31년에는 임정의 특무공작대인 ‘한인애국단’까지 조직한 것이다.
32년 1월 애국단의 첫번째 거사를 결행한 이봉창 의사는 나라가 망하자 일본인들 밑에서 생활하며 일본말도 배우고 자신만을 위해 사는 데 힘썼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일본 사람에게 멸시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스스로 민족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목숨을 잃게 될 것이 분명한 일왕 저격도 스스로 계획을 세워 임시정부에 찾아와 그 뜻을 전했다. 백범은 그의 굳은 의지를 확인하고 애국단에 입단시켜 폭탄을 제공하는 등 뒷받침을 한 것이다.
이봉창의 의거가 있은 지 20일 뒤인 1월28일, 일본군은 만주 강점도 모자라 중국 최대 국제도시인 상하이 북쪽 우쑹(오송)에 상륙해 중국군을 공격했다. 이 전쟁을 중국에서는 ‘송후전쟁’, ‘상하이사변’ 혹은 ‘1·28사변’이라고 불렀다. 중국 정부는 만주사변(9·18사변) 때와 마찬가지로 전쟁을 회피했으나, 이 지역에 주둔중인 제19로군과 지역수비대는 상하이 시민의 지원 아래 용감히 응전했다.
백범은 이 전쟁에 기여하려고 노동자들 틈에 애국단원을 투입해 일군의 탄약고와 비행기 격납고에 폭탄 설치 계획을 세우는 한편, 중국인 잠수부들을 고용해 정박중인 일본 군함에 시한폭탄을 설치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상하이 중국 수비대들은 용감히 응전해 중국민의 숭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지원이 없는데다 무력의 격차로 결국 3월4일 굴욕적인 휴전이 이루어졌다. 중국인들은 이날을 국치일로 생각할 정도로 통분했다.
애국단은 그해 초에도 조선 총독을 암살하고자 이덕주와 유진식 두 의사를 국내에 밀파하고, 관동군 사령관을 처결하고자 유상근과 최흥식을 파견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일제는 일왕의 생일인 4월29일 상하이 북부 일본인 지배 구역 안에 있는 훙커우공원에서 대대적인 승전 축하 행사 겸 열병식을 거행하기로 하고 일본 거류민들에게 모두 참여하도록 통고했다.
그즈음 훙커우 시장에서 장사를 한 적도 있는 매헌 윤봉길이 백범을 찾아와 상하이 침략의 원흉들을 일거에 제거할 계획을 제시했다. 그는 일본 교민들에게 ‘벤토’(도시락)와 물통을 갖고 오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을 알리며, 일본인 시장에서 그것들을 하나씩 사 와서는 중국군 조병창에서 폭탄을 조립해 달라고 건의했다.
백범은 중국군 장교로 조병창에 근무하고 있는 김홍일(중국 이름 왕웅)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매헌은 국내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하다가 광복전선에 투신하고자 상하이를 찾아온 열혈청년이었는데, 이 거사로 목숨을 나라에 바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윤 의사의 거사는 항일 의열투쟁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사건이었다. 그날 윤 의사가 던진 특제 폭탄으로 상하이 침략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민단장 등이 죽음을 당했으며, 일본의 고급장교 및 외교관 등 여러 명이 중상을 입었다. 일본은 애초 국위를 떨치려고 상하이 주재 각국 공관장들도 초청했으나 이들은 일본의 침략행위에 반대하는 뜻에서 경축식 참석을 거부했기 때문에 사상자는 모두 일본인뿐이었다. 이 거사로 우리 겨레의 사기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인의 분풀이도 해준 셈이어서 두 나라 국민들의 일체감도 다시금 다져졌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윤 의사의 거사는 항일 의열투쟁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사건이었다. 그날 윤 의사가 던진 특제 폭탄으로 상하이 침략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민단장 등이 죽음을 당했으며, 일본의 고급장교 및 외교관 등 여러 명이 중상을 입었다. 일본은 애초 국위를 떨치려고 상하이 주재 각국 공관장들도 초청했으나 이들은 일본의 침략행위에 반대하는 뜻에서 경축식 참석을 거부했기 때문에 사상자는 모두 일본인뿐이었다. 이 거사로 우리 겨레의 사기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인의 분풀이도 해준 셈이어서 두 나라 국민들의 일체감도 다시금 다져졌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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