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5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 자싱으로 옮겨간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한 필자 가족. 뒷줄 왼쪽 셋째부터 부친 김의한, 이동녕, 박찬익, 김구, 엄항섭, 은신처를 제공한 중국인 추푸청의 아들 추풍장, 앞줄 왼쪽 둘째가 모친 정정화와 다섯살 무렵의 필자, 한 사람 건너 엄항섭의 부인과 아들딸, 추풍장의 부인 등이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18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프랑스 조계 당국은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계속 보호해 줄 수 없게 됐다며, 서둘러 다른 지역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다. 한편 일본은 경찰을 프랑스 조계에 투입해 임정 지도자들을 색출·체포하는 데 혈안이었다. 이 와중에 도산 안창호가 붙잡히고 말았다. 백범은 피해를 줄이고자 도쿄와 상하이 거사의 주모자가 자신임을 외신을 통해 밝혔다. 그러나 일경은 임정 관계자 전원을 상대로 체포 작전을 전개했다.
임정은 우선 좀더 안전한 지역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윤 의사의 거사가 중국의 원수도 갚은 셈이었으므로 중국 각계에서 임정에 대한 지원이 이어졌다. 중국의 혁명 원로로서 쑨원(손문)의 오랜 동지이며 국민당의 중요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추푸청(저보성)도 그 후원자의 한 사람이었다. 백범이 주모자로 알려지자 일제는 그의 체포에 20만원의 현상금을 내걸었다가 나중엔 60만원으로 올렸다. 상하이에 머무는 것이 너무나 위험해지자 백범은 남파 박찬익의 알선으로 저장성 자싱현에 있는 추푸청의 양아들 천퉁쑨(진동손)의 집으로 피신해 2~3년을 보냈다. 백범의 피신처에서 가까운 곳에 추푸청이 경영하는 ‘슈룬사창’(면사공장)의 사무실 겸 간부숙소가 있었는데, 임정의 주요 간부와 그 가족들을 위해 그곳을 비워준 덕분이었다.
그해 5월 자싱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다섯 살이었다. 이사할 무렵의 일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나 그 이듬해부터는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일들이 있다. 임정의 어른들 중에는 석오 이동녕과 성재 이시영, 두 분이 계속 자싱에 머물렀으며, 남파와 일파 엄항섭의 가족, 일파의 동생 엄도해 그리고 우리집 세 식구가 그곳에서 살았다. 나중에 백범의 어머니(곽낙원)와 두 아들 인과 신도 와서 함께 지냈다.
윤 의사의 훙커우 의거를 계기로 임정뿐 아니라 다른 항일운동 단체들도 더 적극적으로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게 됐다. 중국 정부 당국도 가능한 한 우리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했다. 그러나 일제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에서 한계가 있어 임정은 정식으로 청사를 정하고 활동할 수는 없었다.
상하이를 떠난 임정 인사들은 대부분 난징·항저우와 자싱으로 흩어지게 됐는데, 특히 임정의 주요 요원들은 항저우와 자싱으로 나뉘어 있었다. 두 도시 사이는 기차로 2시간 걸리는 인접이지만, 당시의 형편으로는 내왕이 편치 않았다. 국무회의는 주로 큰 도시여서 이목을 피하기 좋은 항저우에서 열렸다. 아버지는 매달 1·2회 정도 두 도시를 내왕하며 연락을 맡았다.
백범이 피신했던 집은 지금은 자싱시의 ‘지방문물단위’로 지정되고, 그 옆집까지 진열실로 만들어 관광명소가 되었다. 기거하던 방도 거의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침실은 2층에 있는데, 침대 밑 마루를 열고 내려가면 곧바로 호수로 연결되어 목선을 타고 피신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백범은 여기서 광둥 사람 행세를 하며 여자 뱃사공과 함께 배 한 척을 전세 내 대기시켜 놓고 지냈다 한다.
난후라고 불리는 이 호수에서는 여자들이 놀잇배를 저었는데, 그들은 촨냥(배 젓는 아가씨)이라고 불리었다. 손님들은 낮에 뱃놀이를 하고, 밤새우며 마작을 하며 선상에서 촨냥이 지어주는 식사도 즐길 수 있었다. 이때 백범이 사용하던 배의 촨냥은 쭈아이바오(주애보)라는 젊은 여인이었는데, 백범은 종일 배에서 보낸 뒤 밤에야 숙소로 돌아오곤 했다 한다.
백범은 남파의 알선으로 33년초 당시 중국의 수도인 난징에서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를 만나 중요한 합의를 본다. 허난성 뤄양시에 있는 중앙군관학교 제7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해 항일전의 군사간부를 양성하기로 한 것이다. 34년 2월에 창설된 이 특별반은 일제의 강력한 항의 때문에 제1기 졸업생 62명을 배출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 광복군뿐 아니라 옌안에서 창설된 조선의용군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