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국민당을 창설한 쑨원(왼쪽 셋째)이 1924년 6월 광저우시 근처 황푸 중앙군관학교를 찾아 청천백일기 아래서 생도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왼쪽은 쑨원의 친구 랴오중카이와 소련에서 막 귀국한 교장 장제스, 오른쪽은 쑨원의 부인 쑹칭링이다. 사진 북폴리오 제공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20
임시정부와 중국 내에서의 항일투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화민국의 근대사에 대해 간략히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공화국이 성립했으나, 중국의 대부분은 위안스카이 등 군벌이 통치하고 있었고, 민주공화세력은 10여년 동안 일부 지역에만 존속했다.
총통으로 추대받았던 쑨원(손문)은 12년 그의 정치철학을 담은 삼민주의에 입각한 중국국민당을 창설했으나, 자신이 망명하는 처지가 되면서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신해혁명 이후 10여년을 쑨원은 군벌들과 타협도 하고, 영국 또는 일본의 지원을 받기 위해 노력도 해봤으나 모두 동상이몽으로 자기 이익만 내세워 무위로 돌아갔다.
17년의 러시아혁명은 아시아의 약소민족들에게 상당한 기대를 갖게 했고, 중국의 지식층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쑨원도 러시아혁명에 당연히 깊은 관심을 가졌다. 21년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이 창립되었다. 23년 1월 쑨원은 소련 외무부 대표 아돌프 이오페와 공동성명을 발표했으며, 이것으로 소련과 중국국민당의 협력 기초가 마련됐다.
쑨원은 그해 2월 중국 남단의 광저우시에서 새로운 정부를 세워 중국 통일을 위한 원대한 계획을 마련한다. 소련은 중국에서의 공산주의 혁명을 포기하고, 중국 전역에 대한 혁명정부의 주권을 옹호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협력에 의한 중국 혁명의 완수를 지원한다고 약속했다.
24년 쑨원은 다시 국민당을 강력한 중앙집권 정당으로 재조직했다. 그리고 공산당원 3명을 국민당의 중앙집행위원회에 참여시켰다. 한편 광저우시 근처 황푸에 중앙군관학교를 창설하고 장제스를 교장으로 임명했는데, 여기에도 공산당 출신 교관들이 참여했다. 25년에는 정부를 국민정부로 개칭하고 공산당과의 협력 아래 국민혁명군을 창건했다.
그러는 와중인 25년 3월 쑨원이 병사하자, 뒤를 이은 랴오중카이와 장제스는 쑨원의 유지를 받든다는 명목으로 26년 7월 통일을 위한 북벌전쟁을 본격적으로 개시했다. 북벌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해 불과 2년 사이에 중국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대체적인 통일을 완성했다.
그러나 27년 난징으로 수도를 옮긴 뒤 장제스는 그해 4월 국민당 우파와 손잡고 공산당에 대한 숙청을 단행해 새로운 내전이 벌어졌다. 27년 8월1일 장시성 난창에서 북벌중인 국민혁명군 가운데 공산당 소속 부대들이 ‘난창봉기’를 일으켰다. 같은 해 10월에는 후난성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우여곡절 끝에 31년에는 중국 남부 각 지역의 공산계 유격대들이 장시성 루이진에, 인구 1000여만명이 거주하는 지역에 20여만의 군사력으로 성장한 중화소비에트 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국민정부는 전력을 기울여 이 지역의 공산군 토벌에 집중하게 된다.
그해 9월 일본은 무력으로 중국의 동북 3성을 점령하고, 이듬해 32년 3월에는 만주국 괴뢰정부를 세워 수도를 창춘으로 정하고 곧 신징(신경)이라 이름까지 고쳤다. 일제는 그해 초 상하이도 공격해 서북부 지역을 강점하고, 내몽골의 일부인 러허까지 만주국으로 편입했다.
일본의 노골적인 무력침략은 중국민들을 격분시켰다. 그러나 국민정부는 ‘공비토벌’에만 열중하여 적극 대응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국민당은 이런 노선에 대해 ‘안내양외’(내부를 안정시킨 다음 외세를 물리친다)라는 구호를 붙였지만, 국민당의 비주류파를 포함한 각계에서는 강력히 반발했으며, 전국민이 단결해 일제에 항거하라는 목소리가 날로 커져갔다.
그럼에도 국민당 정부는 계속 일본에 양보를 되풀이하는 유화정책으로 일관하는 한편, 장제스는 100만이 훨씬 넘는 병력을 동원해 루이진의 공산당 정권에 대한 포위와 압박을 계속했다. 하지만 마오쩌둥 지도 아래 중공군은 31년과 33년 사이에 걸친 국민정부의 4차 소탕작전을 게릴라 전법으로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그해 9월 일본은 무력으로 중국의 동북 3성을 점령하고, 이듬해 32년 3월에는 만주국 괴뢰정부를 세워 수도를 창춘으로 정하고 곧 신징(신경)이라 이름까지 고쳤다. 일제는 그해 초 상하이도 공격해 서북부 지역을 강점하고, 내몽골의 일부인 러허까지 만주국으로 편입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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