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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마오쩌둥의 홍군, 항일 향한 대장정 / 김자동

등록 2010-01-31 18:33

1936년말 홍군의 대장정을 이끌고 시안의 옌안에 정착한 중국 공산당의 3대 지도자 저우언라이(왼쪽부터), 마오쩌둥, 보구가 이듬해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3주 전에 찍은 사진.  북폴리오 제공
1936년말 홍군의 대장정을 이끌고 시안의 옌안에 정착한 중국 공산당의 3대 지도자 저우언라이(왼쪽부터), 마오쩌둥, 보구가 이듬해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3주 전에 찍은 사진. 북폴리오 제공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21
1931년 중국 동남부 푸젠성과 인접한 장시성 루이진에서 창설된 중화소비에트 정부는 마오쩌둥의 지도 아래 있었다. 소비에트 정부의 홍군 총사령관은 난창봉기의 주역 주더(주덕)가 맡았다. 그러나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상하이에 있었으며, 중앙위원 대부분은 도시 출신이었다. 소련에서 파견된 고문관과 더불어 이들은 소련의 전례에 따라 대도시 노동자 중심의 혁명을 주장해, 농민 중심의 혁명을 구상하는 마오의 노선은 걸림돌이 됐다.

결국 34년초 공산당 중앙위에서는 마오의 직위를 박탈하고 중앙군에 대항하는 전법도 바꿨다. 새 지도부는 참호를 파고 수비하는 정규 진지전을 채택했다. 당시 중앙군은 70만 대병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제5차 토벌작전을 벌인다. 여기서 홍군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한때 20만에 이르렀던 병력이 겨우 반만 살아남았다. 이에 홍군은 루이진에서 버티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대탈출작전을 개시했다. 총인원 10만명 가운데 전투병력은 8만5000명 정도였다. 이들은 무작정 서쪽을 향해 탈출했을 뿐, 처음부터 목표를 정한 것은 아니었다.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 홍군 토벌에 온힘을 집중하는 동안 일본은 오랫동안 품어왔던 중국 점령의 야욕을 계속 진행했다. 31년 동북 3성(만주지역)을 점령한 데 이어 32년에는 상하이시의 북부지역을 강점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내몽골지역까지 진출했으며, 러허성을 괴뢰 만주국에 편입시켰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독일의 조차지인 자오저우만 지역을 차지한 일본군은 종전 이후 철수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인접까지 주둔지를 확장했다. 35년에 이르러서는 내몽골의 대부분과 베이핑(지금의 베이징) 주변을 포함한 허베이성의 상당 부분에까지 군대를 진주시켰다. 일본의 침략행위에 맞추어 내전을 멈추고 거족적인 항일전을 준비하라는 중국 각계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당연했다.

루이진을 탈출한 홍군은 35년 1월 서남부 구이저우성 쭌이에 도착했다. 그리고 여기서 개최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지도부의 패전 책임을 추궁한 결과 마오쩌둥이 당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대중의 항일 의지를 인식하고 있었던 공산당은 곧 장정 목적지를 일제의 점령지와 비교적 가까운 서북 방향으로 정했다. 루이진을 탈출한 지 1년쯤 지난 35년 가을, 홍군은 이후 10년 항일전쟁의 근거지가 될 산시(섬서)성에 도착했다.

루이진을 출발한 10만명 가운데 산시까지 살아 도달한 사람은 8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마오 자신이 옌안에 도착해서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고 자리잡은 것은 36년말쯤이었다. 옌안은 중서북부 최대 도시인 시안의 북쪽 200㎞ 거리에 있는 작은 읍이었는데, 이때부터 47년까지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가 됐다.

홍군을 추격하던 중앙군과 쓰촨 군벌 부대들은 쓰촨성 서부의 이족 거주지역에 이르러 일단 공격을 멈췄다. 홍군의 잔여 병력도 보잘것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형이 너무나 험준했기 때문이다. 중앙군은 공중정찰로 홍군의 퇴각 방향을 항상 파악했으며, 산시에 있는 20만 가까운 중앙군이 이들을 섬멸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시안을 중심으로 한 산시성에는 일본군의 공격으로 만주에서 후퇴한 장쉐량의 동북군과 산시 군벌 양후청(양호성) 휘하의 부대가 있었는데, 이들은 난징 국민정부에 편입되어 있어 명령만 내리면 즉시 홍군 토벌작전을 전개할 태세였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동북 3성을 거의 무저항으로 내주고 관내(만리장성 남쪽)로 후퇴한 장쉐량 부대는 장병 대부분이 동북 3성 출신이었다. 일본 침략군을 물리치고 빼앗긴 고향을 되찾는 것만이 이들의 소원인 것은 당연하다. 일제의 침략 마수가 장성 남쪽까지 뻗치게 됨에 따라 동북군과 일군의 충돌이 걱정된 중앙정부는 이들의 장기 주둔지를 산시성으로 정했다. 동북군이 진주함으로써 그곳의 토착 양후청 군벌에 대한 견제도 가능한 한편, 산시성 쪽으로 진출한 홍군을 섬멸하는 책임도 지게 된 것이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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