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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나치·파시스트 정권과 손잡은 일본 군국주의 / 김자동

등록 2010-02-02 18:32

1936년 독일·이탈리아·일본은 ‘3국 추축동맹’을 맺어 제2차 세계대전을 향한 행보를 시작했다. 당시 독일 제3제국 총통 히틀러(오른쪽 둘째)가 베를린을 방문한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의 무솔리니(왼쪽 둘째) 총리 일행을 맞고 있다.
1936년 독일·이탈리아·일본은 ‘3국 추축동맹’을 맺어 제2차 세계대전을 향한 행보를 시작했다. 당시 독일 제3제국 총통 히틀러(오른쪽 둘째)가 베를린을 방문한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의 무솔리니(왼쪽 둘째) 총리 일행을 맞고 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23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처음부터 ‘부국강병’이란 목표 아래 출발했다. 정치개혁을 통해 입헌군주제도가 도입됐으며,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민주주의도 어느 정도 정착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산업화의 성공은 이 시기에 이르러 일본을 자본주의가 확립된 현대국가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반면 메이지 초반부터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을 추구했으며, 군부가 항상 이 노선에 앞장 서면서 권력에 크게 작용했다. 대만과 조선을 강점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만주침략과 중국 전체의 지배를 목표로 삼았다. 적어도 일본 역사상 가장 민주적이라고 볼 수 있었던 20년대에도 군비증강과 침략준비는 추진되었다.

20세기 초 일본의 군국주의 발전을 사실상 지원하고 조선을 강점하는 것을 승인한 영국과 미국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지속되는 일본의 군비확장에 위협을 느껴 제동을 걸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실질적인 성과는 거의 없는 반면 미국 내의 일본인에 대한 차별정책 등으로 일본에서는 반미정서가 높아져갔다. 31년의 만주침략 강행과 더불어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은 더욱 강화되고 중국에 대한 침략행위도 더 노골화된다.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통치’도 서서히 막을 내리고 우리 겨레에 대한 압제와 수탈도 더해갔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맺은 베르사유조약은 패전국인 독일이 군사대국으로 재기하는 것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 제약을 강요했다. 그리고 전쟁의 피해를 보상받고자 독일에 견디기 어려운 배상을 짊어지게 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결과적으로 독일의 재무장을 막지 못한 반면 독일인에게 준 모욕감으로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만 부추겨 나치당이 집권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다.

독일은 36년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부와 동맹을 맺었으며, 두 나라가 힘을 합쳐 합법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스페인 우파 반란군을 적극 지원했다. 그러는 중 36년 11월에 이르러 일본과 독일 사이에 반코민테른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일·독·이 3국의 추축동맹이 형성된다. 이렇게 36년과 37년은 중국과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근현대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가 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35년 가을 산시성에 도착한 홍군의 수는 8000명 정도였으며, 이들의 섬멸을 맡은 중앙군 병력은 그 20배는 되었다. 무장도 월등하고 항공기 지원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홍군 토벌작전이 재개됐을 때 이들이 만만찮은 상대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쯤 뒤인 36년 가을에 이르러서는 중국 중동부 다볘산(대별산) 지역의 홍군 유격대와 서남쪽에서 간쑤(감숙) 쪽으로 북상한 유격대가 각각 옌안 중심의 유격전 기지로 집결해 병력이 총 8~9만 정도로 다시 늘어났다.

장쉐량 휘하의 동북군은 처음에는 국민당 정부(중앙정부)의 명령에 따랐으나 점차 소극적으로 대치하다가 결국 사실상 휴전으로 들어갔다. 중앙정부도 전투가 사실상 중단된 상태라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어 산시성 전선의 대부분을 난징에서 파견된 다른 부대로 대치했다. 그러나 다시 장시 시대를 능가하는 전투력을 갖춘 홍군을 섬멸하려면 동북군의 전면적 참여가 긴요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32년 러허성을 강점한 일본은 36년 10월 내몽골의 나머지 지역으로 점령지를 확대해 나갔다. 중국 각지에서는 항일시위가 일어나고 상하이·칭다오 등지의 일본인 투자기업 노동자들도 파업을 했다. 일본의 중국 침략이 심화될수록 중국 각계의 내전 종식과 항일통일전선 결성 주장이 더욱 많은 지지를 받았다. 중국공산당도 35년 산시성에 도착한 뒤 국민당과 공산당이 다시 협력해 항일전선을 펴나가자는 요구를 내세웠다.


그러나 장제스의 ‘내부를 안정시킨 다음에 외적을 물리친다’(양외필선안내)는 전략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에는 계속 양보하면서도 자국민의 저항은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러는 동안 홍군과 동북군은 묵시적인 휴전에서 서서히 협력자의 관계로 진전되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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