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사변이 터지기 한달 전쯤인 1936년 10월말 뤄양에서 장제스(오른쪽부터)과 부인 쑹메이링, 장쉐량이 나란히 함께했다. 사건 이후 장쉐량은 감금을 자청해 50년 넘게 갇혀 지내다 2001년 하와이에서 106살로 타계했다. 사진 김명호씨 제공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24
국민당 중앙정부의 지시로 형식적인 저항만 하고 동북 3성을 일본 침략군에게 내주었을 때도 용병에 지나지 않았던 장쉐량 휘하 동북군 장병들의 반발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가족과 떨어져 타향살이를 하면서 이들은 애향심과 애국심이 점차 생기고, 시안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연 항일의식도 높아졌다. 중앙정부는 이런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1936년 10월 장제스는 동북군을 홍군 토벌에 참여시키려는 일념으로 시안을 방문했다.
장제스가 시안에서 장쉐량을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동북군과 서북군은 쿠데타 계획을 진행했다. 12월12일 새벽 양 군은 반란을 일으켜 시안 시내의 중앙군 참모부와 정보기관을 기습 접수하고, 성장과 경찰국장을 체포했다. 경비병들이 저항하는 동안 뒷산으로 피한 장제스는 곧 체포되었다. 반란군 본부로 압송당한 장제스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양후청과 장쉐량이 직접 반란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쿠데타를 일으킨 바로 그날 동북군과 서북군 휘하 각 사단장은 연명으로 “장제스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당분간 시안에 체류하도록 요청”했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그에게 ‘구국’을 위한 8개항을 요구했다. 난징 정부의 확대개편, 내전중지 항일정책 채택, 투옥중인 애국 지도자 석방, 정치범 사면, 집회자유 보장, 정치적 자유 보장, 쑨원의 유지 실천, 구국회의 소집이 그것이다. 장쉐량은 반란 이틀 뒤 전용기를 보내 저우언라이를 수반으로 하는 공산당 대표단을 시안으로 오게 했다. 동북군, 서북군 및 홍군은 항일연합군으로 통합하기로 합의하고, 장쉐량을 군사위원회 위원장, 양후청을 부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병력도 동북군 13만, 서북군 4만, 홍군 9만으로 강화됐다.
장쉐량은 처음부터 장제스를 위해할 의도가 없었다. 그리고 공산당 대표인 저우언라이도 장제스만이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반면 직계 부대인 중앙군이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토벌전을 진행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장제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쨌든 장제스도 차츰 대화에 응하여 내전을 종식시키고 일본의 침략에 더는 후퇴하지 않겠다는 원칙에 합의하고, 그해 성탄절에 풀려나 난징으로 귀환했다.
장제스 귀환 이후에도 중앙정부는 여전히 홍군을 비적으로 불렀다. 시안에서의 합의는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토벌작전은 중지됐으며, 투입됐던 병력의 대부분은 일본군이 집결돼 있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국민당은 37년 2월15일 중앙집행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선통일 후저항’이란 말이 사라졌다. 대신 ‘최대의 문제’로서 ‘실지 회복’을 역설, 우선 허베이성 동부와 차하얼성 북부(현재 네이멍구자치구 동북부)를 회복하고, 이 두 곳에 수립된 ‘괴뢰 자치’위원회를 폐지시킨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또한 그해 11월12일의 ‘국민대표회의’ 소집과, 더 많은 자유의 보장 및 ‘잘못을 뉘우친’ 정치범들의 석방 등을 결의했다. 그리고 회의 마지막날인 2월21일에는 공산당의 반란 10년에 걸친 죄행들을 나열하며 비난했으나, 끝에 가서는 공산분자들에게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를 준다는 전제 아래 첫째 홍군을 해체하고 국민군으로 편입할 것, 둘째 소비에트 공화국을 해체할 것, 셋째 쑨원 박사의 삼민주의에 배치되는 공산주의 선전을 중단할 것, 넷째 계급투쟁을 포기할 것을 제안했다. 이 결의는 사실상 공산당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3월15일 중국공산당, 중화소비에트정부 및 홍군은 연명으로 중앙정부와의 협상을 요구하는 선언서를 발표했으며, 중앙정부는 서북지구의 군사적 우위를 확보한 뒤에야 공산당과의 협상을 개시했다. 이제 중국 언론에서 ‘공비’와 같은 표현은 사라졌으며, 홍군 지역에 대한 봉쇄도 풀렸다. 소비에트정부와 국민정부 통치지역 사이의 우편교환도 개시되었으며. 중앙정부는 공산당에게 물자뿐만 아니라 현금도 지원했다. 국공이 적대관계를 멈추고, 언론자유가 더 많이 보장됨에 따라 난징과 상하이 등 중국 각지에는 봄이 찾아온 듯 활기가 넘쳤다. 임시정부와 우리 한인사회도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시안사변’은 아시아 역사의 방향을 바꾼 결정적 사건이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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