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일본군 진격에 밀려…임정, 난징 떠나 창사로 / 김자동

등록 2010-02-04 18:51수정 2010-02-08 18:15

193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걸쳐 중국인 30여만명이 희생된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군 수뇌, 중지파견군 사령관인 마쓰이 이와네 장군(왼쪽)과 난징 공격을 지휘한 왕족 출신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육군 중장.(오른쪽) ‘포로 사살 명령’은 아사카가 내렸으나 마쓰이가 책임을 지고 국제전범으로 사형됐다.
193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걸쳐 중국인 30여만명이 희생된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군 수뇌, 중지파견군 사령관인 마쓰이 이와네 장군(왼쪽)과 난징 공격을 지휘한 왕족 출신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육군 중장.(오른쪽) ‘포로 사살 명령’은 아사카가 내렸으나 마쓰이가 책임을 지고 국제전범으로 사형됐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25
루거우차오 전투는 처음에는 국지적인 충돌로 그치는 듯했다. 1937년 7월11일 중·일 두 나라의 현지 사령관들은 전투행위를 중지하는 데 합의했다. 그런데 일본 내각은 중국군 제29군의 저항을 ‘중국 쪽의 계획된 무장항쟁’으로 보고 28일 베이핑과 톈진, 두 도시에 총공격을 했다. 일본군은 마침내 8월13일 상하이로 진격하여 전쟁은 전면전으로 번졌다. 이에 중국 정부는 전면적인 항일투쟁을 선포했다. 홍군은 약속대로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편입됐으며, 공산당은 2월10일의 합의를 이행해 나갔다. 이런 사태는 우리 혁명선열들이 바랐던 것이었기에, 임시정부와 여타 난징의 항일단체들도 항일전쟁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상하이에 상륙한 일본군은 4개월 가까운 고전 끝에 12월 난징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진격 도중 포로와 민간인을 함부로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약탈·방화·강간 등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난징을 점령한 뒤에는 2개월에 걸쳐 전쟁포로는 물론 어린이와 노약자를 포함하여 민간인 30여만명을 학살했다.

무차별 기총사격, 생매장, 구덩이에 몰아넣어 휘발유를 뿌려 화장하는 등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군도를 갖고 목 베기 시합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난징대학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남아 있고 제2차 대전 이후 전범재판에서도 확인됐다. 그러나 당시 일본 신문은 일체 함구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역사를 왜곡하고 은폐를 일삼는 일본 극우파들은 이를 전적으로 부인하고 있어, 그런 사실을 아직도 잘 모르는 일본인이 많다.

5년 전 광복 60돌 기념으로 임시정부의 항일 발자취를 돌아보는 100여명의 답사단을 이끌고 난징을 방문했을 때 대학살기념관을 관람한 적이 있다. 충격적이면서 뜻있는 탐방이었다. 기념관 입구에 ‘평화대종’이라는 큰 종이 있는데, 여기에는 “먼저 일을 잊지 않아 뒷일의 스승이 되며, 역사를 거울삼아 미래를 개척한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 기념관에는 일본인들도 많이 찾아와 조화를 올리고 감상문을 남기고 있다. 그들의 역사인식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일본의 극우파들은 과거에 대한 반성을 자학적이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극우파들과 표현 방식까지도 비슷한 것 같다. 중국의 항일전에 참여하고자 우리 항일단체들의 정비가 진행되는 동안 난징이 위태로워지면서 임정도 이전 대책을 세워야 했다. 중국의 국민정부는 서남부의 쓰촨성 충칭시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선박을 포함한 모든 교통수단이 정부와 군의 통제 아래 들어갔으므로 우리 동포들의 철수에도 중국 정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일본군이 난징을 향해 진격을 계속하는 동안 임정 가족들과 동포들은 중국 정부가 제공하는, 기선이 예인하는 목선을 타고 창장강(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배편으로 우한에 도착한 임정 일행은 다시 기차 편으로 12월초 후난성의 수도인 창사시에 도착했다. 창사에서 여장을 푼 뒤 임정에서는 장시성 서북부 우닝현에 있던 우리 가족에게도 빨리 그곳으로 오라고 통지했다. 우리 가족은 38년 2월초 우닝을 떠나 버스~기차~선박~기차를 갈아타며 며칠을 걸려 창사에 도착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창사 시내 톄푸둥제(쇠부처골거리)에 있는 허술한 집에 우리 가족의 숙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작은 방 하나에는 성재 이시영 선생이 묵고 있었으며, 더 큰 방을 우리 가족이 쓰게 되었다. 그로부터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우리 식구는 8년 가까이 단칸방을 썼는데, 방 안에서 취사도 하고 식사도 하며 비좁게 지내야 했다. 더구나 사촌형 석동과 함께 있어 네 식구가 침대 둘에 나누어 자기는 너무나 좁았다.

임정 산하에는 언제나 청년들의 합숙소가 마련되어 있었으므로 석동 형은 얼마 안 돼 그곳으로 옮겼다. 대부분 20대인 청년들 사이에 16살인 형이 막내둥이로 참가한 것이다. 형은 그곳의 생활이 무척 즐거웠던 것 같았다.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잔소리도 안 듣게 되고 다른 형들의 귀염도 받는 것이 좋았던 것이다. 어쨌든 형은 그때부터 계속 임정 합숙소를 따라 움직였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