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학살을 피해 임시정부를 따라 중국 후난성 창사에 머물던 1938년 3·1절 기념행사와 여흥을 마치고 행사장인 강당 옆에서 찍은 기념사진. 앞줄 왼쪽 다섯째가 10살 무렵의 필자.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26
우리 가족은 1938년 2월초 창사시에 도착해 7월까지 머물렀다. 그곳에 있는 5개월 남짓 동안 나는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른 지방에서도 중국 학생 동무들이야 있었지만, 늘 거리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같은 핏줄의 친구들을 사귀게 된 것이 기뻤다. 우리끼리도 보통 중국말을 하고 지냈지만, 과거에 사귀었던 중국 아이들과는 다른 친근감을 느꼈다.
창사에서 머문 기간이 중국 소학교에 다니기에는 너무 짧아, 국어와 우리 노래 등을 공부시킬 목적으로 10여 명에 지나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 임정에서는 임시학교를 개설했다. 교장은 일본 와세다대학 재학 중 항일투쟁에 가담한 이달 선생이 맡았으며, 송면수·김효숙 내외분이 국사와 국어를 가르쳐줬다. 그리고 노래와 춤은 김철 선생이 맡았는데. 그때 배운 노래들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창사에 도착한 지 한 달도 못 돼 3·1절을 맞이하여 망명정부로서는 처음으로 제법 큰 강당을 빌려 기념행사를 했다. 이때 단상에 깃대를 세워 태극기를 올리는 순서가 있었는데, 참석자 중 부인들이 감격하여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더니 결국 국기 게양식은 울음바다로 변했다. 우리 어린아이들도 따라 훌쩍였다.
그리고 10여 일이 지났을 때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서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도산은 앞서 언급했듯이, 윤봉길 의사의 거사가 있은 뒤 상하이에서 왜경에 잡혀 국내로 압송돼 옥살이를 했는데, 병세가 위독하여 회생 희망이 없자 형 집행을 정지시켜줘 경성대 부속병원에서 병사를 한 것이다. 3·1절 기념식이 열렸던 장소에서 도산의 추모행사가 있었다. 이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어머니가 얼마나 슬프게 우셨는지 나도 따라서 눈물을 흘린 기억이 난다.
창사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임정 계열 3당이 통합을 논의하는 도중 이운한이라는 조선혁명당원이 권총을 난사한 일이었다. 묵관 현익철이 피살됐고, 백산 이청천 장군이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백범과 춘교 유동열도 큰 부상을 입어 그곳 상야의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범행 동기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국민당계 일부 인사들에 대한 불만 때문에 충동적으로 한 행동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백범을 뺀 나머지 사상자는 모두 자기 당 사람들이었다. 창사에서의 생활은 남목청에서의 총격 사건 외에는 특기할 만한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때는 중-일전쟁 등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 정세가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던 시기였다.
36년 7월 스페인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공화파 인민전선 정부에 반대해 일으킨 군사반란은 왕당파, 가톨릭교회 등 극우세력의 지원을 받았다. 반란세력은 군사적으로뿐만 아니라 충분한 경제적 뒷받침으로 우위를 차지했으나, 노동자·농민 등 광범위한 인민의 지지를 받은 공화파가 쉽게 무너지지 않아 내란은 길어지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 대해 서방국가들은 불간섭 정책을 내세워 어느 쪽에도 지원을 하지 않았다.
반면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군비 지원뿐만 아니라 항공기를 파견해 반란군을 지원했으므로 인민전선 정부군은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 자기 나라 정부와는 달리 미·영·프랑스의 지식청년 다수가 외인부대를 조직, 지원병으로 참전했으나, 전세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소련만이 정부군을 지원했는데, 그 영향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정부군의 주도적 위치에 오르면서 아나키스트 등 일부 세력과 관계가 나빠져 내부 분열이 발생하는 부작용도 적지 않은 듯했다.
우리가 창사에 머무는 동안에도 공화파 정부군은 계속 몰렸으며, 결국 39년 3월말에 이르러 3년간의 내전은 우파 반란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에서의 전사자, 민간인 희생자 및 승리자들의 잔학행위 등으로 적어도 50만명 이상이 희생됐다. 전쟁으로 인한 기아, 영양실조 등의 간접적인 희생까지 합하면 100만 가까이가 전화로 목숨을 잃었다. 중-일 전쟁 때에도 미국과 영국 등 서방국가들은 중국에 동정적이었으나, 실제적인 지원은 거의 없었다. 반면 일본과는 교역을 통해 전략물자를 계속 공급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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