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주최 ‘제1차 광복 60돌 대학생 유적지 답사’ 단원들이 광저우시를 방문해 쑨원의 호를 딴 중산대학 입구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임정 시절 중산대학에서는 한국인 유학생을 많이 받아들여 상하이로 망명했던 애국청년 상당수가 이 대학을 다녔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28
임시정부 가족들은 1938년 7월 중순 광둥성의 광저우시를 향해 기차로 출발했다. 광저우는 중-일 전선과 멀리 떨어져 있어 비교적 안전한 지역으로 생각됐다. 그리고 홍콩 및 프랑스령 베트남과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임시정부에서는 중국과 협력관계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유지하면서 국제적 연결도 고려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일행은 7월20일께 광저우시에 도착해 둥산(동산)구에 있는 아시아 여관에 짐을 풀었다. 둥산구는 비교적 부유한 사람, 특히 외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의 별장이 많이 있는 곳으로 거리도 깨끗하고 골목까지도 포장돼 있어 그때까지 보아온 중국의 다른 지역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임정은 우리가 묵은 여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이위안(백원)이라는 별장을 세내어 사무실로 썼는데, 그곳에 백범과 일파가 묵었으며, 청년 10여명의 숙소도 겸했다.
광저우에서 1개월 남짓 여관에 머물던 임정 사람들은 10여명의 연락담당자만 남겨두고 9월초 광저우 서쪽 약 25㎞ 지점에 있는 포산(불산)현으로 옮겨갔다. 몇해 전에도 임정 인원이 난징과 난징 동쪽 60~70㎞ 지점의 전장에 나뉘어 있었던 일이 있다. 정부 부서와 대부분의 인원은 전장에 있으면서 백범 등 중국 당국과 접촉이 많은 분은 난징에 있었다. 작은 도시의 체류비가 덜 들어 그렇게 했던 것이다.
이때도 포산은 광저우보다 생활비가 덜 들었으며, 광저우가 거의 매일 폭격을 받고 있어 안전도 고려했던 것 같다. 우리가 광저우에 있는 동안 일본 함대기들이 거의 매일 공습을 해왔다. 창사에서 공습을 당했을 때도 그랬거니와 일본은 그 후 몇해 동안 중국 각 도시의 인구밀집지역을 폭격했다. 당시 삼국동맹의 독일도 런던을 공습 목표로 삼았는데 명백히 민간인 살상을 노린 것이었다. 아마도 공포감을 조성해 저항 의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인 듯하다.
포산에서 임정 가족들은 민가에 각기 방을 얻어 흩어져 지냈다. 포산에 도착하고 약 2주 뒤 임정에서 제법 큰 집 한 채를 세내어 청사로 사용했는데, 우리 세 식구는 청사 안으로 들어가 살게 됐다. 우리 식구 외에 이 집에는 주석인 석오 이동녕 선생을 비롯해 성재 이시영, 신암 송병조, 동암 차리석 등 홀로 사는 어른들이 함께 지냈다.
여기서도 임정의 안살림은 어머니(정정화)가 맡았으며, 중국 지방관청 관계 일은 아버지(김의한)가 도맡았다. 광둥성은 중국 남단에 있어 일본이 해상에 떠 있는 항공모함을 이용해 연일 공습을 했으나 전선과는 거리가 멀어 상당히 안전한 후방이었다. 그런데 10월초 뜻밖에도 일본 육전대가 광둥성 동남해안에 상륙해 빠른 속도로 광저우시로 진격해 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긴급사태가 터지면 모든 교통수단은 정부가 통제하기 마련인데, 더구나 기차를 얻어타려면 광저우에 있는 위수사령부의 차량배정 명령 없이는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광저우에 있던 일파 엄항섭으로부터 10월18일 밤 포산에서 싼수이(삼수)로 가는 객차 한 칸을 배정받았다는 통지가 왔다. 임정에서는 광저우와 포산에 산재한 가족들에게 연락해 모두 짐을 갖고 청사에 집결하도록 했다.
그러나 자정이 되도록 서류와 필요한 비용을 갖고 출발했다는 일파가 도착하지 않아 적지 않게 걱정들을 했다. 광저우에서 포산까지는 불과 20~30㎞였으나 그때는 여객선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수백만명이 광저우를 빠져나오려는 대혼란의 상황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자정이 넘어서야 일파가 포산 청사에 도착해, 모두들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반기며 함께 역으로 향했다. 멀리서 들리던 기관총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혹시라도 기차를 탈 수 있을까 하고 역에 모여든 시민 사이를 뚫고 개찰구까지 가는 것도 힘이 들 지경이었다.
싼수이는 포산에서 서북쪽으로 약 25㎞ 지점에 있는 도시로, 바로 광싼(광저우~싼수이) 철도의 종착역이다. 우리 기차가 새벽에 싼수이역에 도착하자 일본 항공기들이 기차를 향해 저공사격을 해왔다. 모두 당황해 근처 사탕수수밭으로 몸을 숨겼다. 다행히 우리가 탄 열차는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임정 가족들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