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4월29일 윤봉길 의거로 상하이를 떠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가족은 항저우~전장~창사~포산~류저우를 떠돈 끝에 39년 4월30일 치장에 이르러 45년 광복 이후 환국 때까지 충칭에서 정착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31
임시정부 가족 일행은 1939년 4월4일, 버스 다섯대에 나눠 타고 광시성의 류저우를 출발해 충칭으로 떠났다. 내 나이 겨우 12살이었으나 중국 창장강 이남의 드넓은 지역을 모두 여행한 셈이었다. 6~7살 이전에 살았던 상하이, 자싱, 항저우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나지 않으나, 그후 5년 남짓 동안의 여정은 어린 나에게도 큰 경험이었다. 류저우까지 거쳐온 지역들은 산도 있었으나 넓은 평야가 많아 비교적 살기 좋은 곳들이었다. 그런데 류저우에서부터 충칭 남쪽의 치장(기강)현까지는 대체로 산이 많고 척박한 지세였다. 광시성에 많이 사는 좡족을 비롯해 무라오, 마오난, 부이, 퉁, 먀오 등의 소수민족들이 주로 퍼져 있는 지역이었다. 류저우에서 북서북 방향에 있는 치장까지 지금은 전 지역 고속도로가 뚫려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다. 그런데 우리가 치장에 도착한 것은 4월13일이었으니 버스로 열흘 가까이 걸린 셈이었다. 길도 꼬불꼬불한 곳이 많았고, 비포장 도로였으므로 버스가 느리기도 했지만 중간에 고장으로 하루를 허송했으며, 구이저우(귀주)성의 수도인 구이양(귀양)시에서는 여비가 떨어져 이틀을 허비해야 했다. 우리가 탄 전세버스들은 류저우에서 구이양까지 가는 것이어서, 이곳에서 차를 바꿔 타야 했는데, 버스회사에서 요구하는 운임이 예상보다 비싸 백범이 있는 충칭의 임정사무소로 송금 요청을 하게 됐다. 구이양에서 1박 정도 예정이었는데, 다음날 오후가 돼도 출발할 기미가 없어 어머니가 물어보니 아버지는 그제야 여비 부족 때문이라고 말한 듯했다. 아버지가 장시에서 중국 지방관청에 취직해 있는 동안 어머니는 생활비를 아껴 아버지 모르게 약간의 저축을 해서는, 인플레이션이 심해 가치가 없는 현금 대신에 주로 은제 식기를 사두셨다고 했다. 그때 어머니가 내놓은 은제 식기들을 금은방에서 팔아 여비를 보탠 덕분에 그나마 더 오랜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떠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훗날 알게 됐다. 현재 중국에서는 류저우~충칭 노선 주변 지역을 대부분 소수민족의 자치현 혹은 자치주로 만들어 그들의 언어·풍습 등을 유지해주는 정책을 쓰고 있다. 이 지역의 소수민족 중 가장 큰 먀오족은 이 선로 양쪽 거의 전 지역에 산재해 있을 뿐 아니라 동쪽으로는 후난과 후베이성 서부와 북쪽으로는 쓰촨성과 충칭시 남부, 그리고 구이저우성 전역과 그 서남쪽 윈난성에까지 널리 퍼져 살고 있다. 먀오족은 오랜 고유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용모도 동남아 민족 중 가장 미인이 많다고 할 정도로 빼어나다. 중국에 약 400만명이 살고 있으며, 베트남·라오스 및 타이에도 약 100만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넓은 지역에 살다보니 풍습과 언어도 차이가 나는 사례가 많아 지역에 따라 몽, 뭉, 무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구이양과 치장 사이에는 쭌이(준의)현이 있는데, 이곳은 마오쩌둥이 장정 동안 공산당의 실권을 장악한 ‘쭌이회의’가 열린 곳으로 유명하다. 우리 일행의 종착역은 쓰촨성 치장현이었다. 현재는 충칭직할시 밑에 있는 치장시이다. 충칭시 중심지와 90㎞ 떨어진 이곳에서 우리는 2년 남짓 머물렀다. 우리가 류저우에 있었던 38년말 임정 부주석인 백범이 구이린에서 직접 중국의 전시 수도인 충칭으로 가 시내 양류가에 연락사무처를 설치했다. 그때 충칭은 연일 일본 항공기의 폭격을 받고 있었으므로, 주석인 석오를 비롯한 국무위원과 청년공작대원 대부분, 100명에 가까운 가족들은 일단 치장에 자리잡기로 한 것이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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