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특별기획 성찰과 도전
조선인 가미카제 평가는
조선인 가미카제 평가는
미군 적함이나 비행기를 향해 육탄돌격을 감행하다 숨진 조선인 특공대에 대한 평가는 매우 복잡하다. 한국인은 일왕을 위해 싸우다 숨진 ‘친일파’라 비판하고, 일본은 그들을 일본을 위해 싸우다 숨진 야스쿠니신사의 ‘영령’으로 모시는 중이다.
그러나 조선인 특공대의 규모, 지원 동기, 사후 처리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는 한·일 두 나라 모두에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향철 광운대 동북아대학 교수(일본경제)는 “조선인 특공대 평가는 한국인에게는 ‘친일은 무엇인가’, 일본인에게는 ‘야스쿠니신사는 무엇인가’ 하는 매우 근본적인 역사적 고민과 맥이 닿는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인천의 자택에서 만난 박혜옥(64)씨는 노기 띤 음성으로 “우리 오빠를 친일파라 부르면 억울하다”고 말했다. 박씨의 오빠 박동훈(1928~1945)은 1927년 4월21일 함경남도 함주군 흥남부 서호리 202번지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씨는 “오빠가 어릴 때부터 비행기에 관심이 많아, 1943년 아버지 도장을 몰래 훔쳐내 소년비행병에 지원했다. 그 때문에 집안이 발칵 뒤집어지고 오빠가 아버지한테 손찌검까지 당했다는 얘길 들었다”고 말했다.
박동훈은 1944년 7월25일 소년비행병학교(소비) 15기로 입대해 1945년 3월29일 일제의 본토 방위 전초전이었던 오키나와 전투에서 적함을 향해 자살공격을 감행하다 숨졌다. 일제는 박동훈이 숨진 뒤 계급을 오장(하사)에서 소위로 추서했고,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는 “박동훈은 친일의 혐의가 짙다”는 이유를 들어 3년째 피해자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다.
박동훈과 관련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가족들이 묘사하는 사연이 너무 달라 눈길을 끈다. 박동훈은 만주에서 비행훈련을 마치고 특공대의 출격기지인 가고시마 지란으로 출발하기 앞서 1945년 2월26일 경성에서 가족들과 마지막 만남을 갖는다.
“오빠가 아버지에게, ‘난 장남이라 특공대에 가면 안 된다고 하니까 군에서는 부모 형제들은 모두 우리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는 거예요. 오빠가 그날 밤 아버지 손을 잡고 잠들면서 ‘동생들은 절대 군에 보내지 말라’고 울었대요.”
같은 장면에 대한 <매일신보> 묘사는 사뭇 다르다. <매일신보>는 4월15일치 ‘나하 해상에 산화한 네번째 신뢰(神鷲), 부뢰 특공대의 오카와 오장’이라는 기사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젖조차 제대로 먹지 못한 아들이 지금은 훌륭한 제국군으로서 그중에서도 용맹스러운 아라와시(荒鷲·용맹스런 전투기비행사)로서 성공해 버린 것을 눈앞에 보고 만족한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고 묘사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10대 후반이었던 소년비행병학교 출신들의 지원 동기와 배경에 대한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국은 해방 65돌을 맞고 있지만 박동훈의 영혼은 구천을 헤매고 있다. 그는 현재 오카와 마사아키(大河正明)라는 이름으로 야스쿠니신사에 강제 합사돼 있고, 2000년에는 ‘일본을 지키는 회’ 등 일본 우익들이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 세운 ‘대동아성전대비’에도 이름이 올랐다. 둘 다 유족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이뤄진 행위였다.
아들을 잃은 고통은 박씨 가족의 몫으로 남았다. 1·4 후퇴 때 고향을 등지고 남한으로 내려온 박씨의 부친은 박정희 정권 때 추진된 ‘한일 회담’을 위해 일본 대표단이 방한했을 때 숙소인 반도호텔(을지로 롯데백화점 터)에 찾아가 항의했지만 대표단을 만나진 못했다. 여동생 박씨는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일본놈과 공산당은 나쁜 놈’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죽는 날까지 아들을 잃은 원통함을 잊지 못했다”고 말했다. 인천/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아들을 잃은 고통은 박씨 가족의 몫으로 남았다. 1·4 후퇴 때 고향을 등지고 남한으로 내려온 박씨의 부친은 박정희 정권 때 추진된 ‘한일 회담’을 위해 일본 대표단이 방한했을 때 숙소인 반도호텔(을지로 롯데백화점 터)에 찾아가 항의했지만 대표단을 만나진 못했다. 여동생 박씨는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일본놈과 공산당은 나쁜 놈’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죽는 날까지 아들을 잃은 원통함을 잊지 못했다”고 말했다. 인천/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