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충칭 시절 임시정부의 세번째 청사로 쓰인 우스예샹(오사야항) 1호 자리. 김구 주석이 <백범일지>를 집필한 곳이자 필자가 또래인 김 주석의 둘째아들 신과 놀기 위해 자주 찾던 곳이다. 방치된 채 남아 있는 목조건물과 표지석마저도 조만간 헐릴 예정으로 알려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32
1939년 4월말 임시정부 대가족이 도착한 치장(기강)은 현재 충칭직할시 관할 치장시로, 제법 번화한 소도시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때는 작은 읍에 지나지 않았으며, 2층짜리 집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임정 식구들이 함께 모여 지낼 만한 큰 건물을 찾을 수 없었다. 치장에 도착한 청년공작대원 중 일부는 충칭 시내로 갔고, 치장에 남은 사람들은 토완 뒷산에 있는 관음암이라는 암자를 빌려 합숙했다.
치장에는 지명과 같은 이름의 강이 있었는데, 이 강은 북으로 흘러 창장에 합류한다. 함께 치장에 도착한 일행은 대부분 2년 동안 타이즈상(상승가)에 머물렀으나 한국독립당 소속 요원과 가족은 강 건너로 숙소를 옮겼다. 한독당은 조선민족혁명당에 합류했다가 탈퇴해 당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상당수 당원이 민혁당에 잔류했으며, 합당에 불참한 사람들은 대부분 국민당에 참여했으므로 남은 당원은 10여명뿐이었다.
치장에 도착한 뒤 나는 소학교 5학년 하급(제2학기)에 편입해 40년에 졸업했다. 치장 시절 항일단체들의 통합 노력이 진행되어 조선민족해방동맹계 각 정당 대표들이 치장에 와서 회의를 열었던 일이 기억난다. 임정 주석 석오 이동녕 선생은 모든 항일단체가 다 임정의 품에 들어오기를 희망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40년 3월13일 별세했다.
중일전쟁이 전면전으로 번진 지 2년이 지난 39년 여름, 일본은 이미 중국의 연해 각성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중국의 항일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일본군은 주로 철도 연변만을 장악했을 뿐, 창장강 이북에서는 중공군(8로군 혹은 신4군)의 유격대들이 후방에서 활약했고, 강남에서도 중앙군의 유격대들이 활동했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서방국가들이 방관하는 사이 독일과 이탈리아가 스페인의 공화정부를 전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독일은 위협과 기만 외교로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탄했다. 39년 여름이 지나면서 독일의 폴란드 침략 의도가 명확해지고서야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를 침공하면 독일에 선전포고하겠다는 경고를 보냈고, 소련에도 폴란드 침략에 공동 대처할 것을 제안했다.
소련은 히틀러의 침략정책에 대항하는 영·프와의 집단안보협약 체결을 희망해왔으나 계속 묵살당했으며, 두 나라는 소련과 협의하지 않고 뮌헨회담(1938년 9월)에서 체코를 독일에 넘겨주기까지 했다. 39년초까지도 소련은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는 즉시 군대를 폴란드 영내로 진입해 함께 방위전을 펼 것을 제의했으나, 폴란드 정부는 응하지 않았다.
39년 여름 소련은 독일과의 흥정을 꾀하게 됐으며, 독일도 동서 양쪽에서의 전쟁을 피할 의도로 리벤트로프 외상을 모스크바로 파견해 39년 8월23일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분할하는 비밀조약까지 체결한다. 그리고 그 1주일 뒤인 9월1일, 독일은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넘어 공격을 시작하고, 이에 영·프가 대독 선전포고를 해 제2차 세계대전이 개시됐다.
이렇게 아시아에서 한때는 일본의 침략 야욕에 가장 강력히 대응했으며, 중국에도 상당한 원조를 해오던 소련이 일본의 동맹국과 야합함으로써 일-소 관계도 변화가 일어나 중국에 대한 지원도 중단된다. 하지만 유럽의 전쟁이 중국에 직접적인 영향은 주지 않았으며, 중일전쟁의 전선도 40년초에 이르러 대체로 교착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제공권을 장악한 일본군은 중국 후방 각 도시에 대한 폭격을 계속했다. 특히 충칭은 제1의 목표였다. 충칭에는 중국군 대공포가 있어 일본군은 고공폭격에만 의존했고 다행히 레이더가 없었던 당시 폭격의 정확도는 낮았다. 그러나 일본의 주된 폭격 목표는 시민 살상이었으므로 민간인 희생은 많았다.
충칭은 ‘산성’(산 위의 도시)과 ‘무도’(안개의 도시) 등의 별칭처럼, 산기슭에 세워진 도시여서 방공호를 파기가 쉬웠다. 특히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5개월 남짓 동안은 안개가 도시 전체를 덮어 일본 항공기들은 이 기간 동안 폭격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시민들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충칭은 ‘산성’(산 위의 도시)과 ‘무도’(안개의 도시) 등의 별칭처럼, 산기슭에 세워진 도시여서 방공호를 파기가 쉬웠다. 특히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5개월 남짓 동안은 안개가 도시 전체를 덮어 일본 항공기들은 이 기간 동안 폭격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시민들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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