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아버지 홀로 두고 백범 노모·아들 돌본 어머니 / 김자동

등록 2010-02-17 18:36

임시정부 대가족이 류저우에서 치장을 거쳐 충칭에 정착하는 와중인 1939년 4월26일 백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장례식이 열렸다. 왼쪽부터 작은손자 신, 큰손자 인, 백범, 김홍서. 곽 여사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인과 나란히 잠들어 있다.
임시정부 대가족이 류저우에서 치장을 거쳐 충칭에 정착하는 와중인 1939년 4월26일 백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장례식이 열렸다. 왼쪽부터 작은손자 신, 큰손자 인, 백범, 김홍서. 곽 여사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인과 나란히 잠들어 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33
임시정부 대가족 일행이 류저우를 떠나 치장에서 여장을 푸는 어수선한 와중인 1939년 4월26일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할머니가 별세했다. 통신이 아주 불편했던 시기였으므로 부음을 알게 된 것은 며칠이 지난 뒤로 생각되는데, 어쨌든 그때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머니(정정화)는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어머니는 곽 할머니를 누구보다도 존경했으며, 어머니의 자서전에도 그분에 관한 회고가 상당히 들어 있다.

앞서 얘기한 대로 할머니는 자신과 어린 손자들이 아들의 항일투쟁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여러 사람의 만류를 뿌리치고 황해도 고향으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32년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으로 백범에게 현상금까지 걸리는 처지가 되면서 가족을 일제 치하에 두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중국으로 모셔오기로 결정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자싱에 있을 때 백범은 국내로 사람을 보내 어머니와 두 아들을 다시 중국으로 오도록 했다.

할머니와 작은손자 신이 자싱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우리 가족은 장시성으로 이주했는데, 그 뒤 1년도 못 되어 자싱에 있는 임정 가족들은 모두 새로 중국의 수도가 된 난징과, 그곳에서 동쪽으로 약 60㎞ 떨어진 장쑤성의 성도, 전장으로 옮겼다. 백범 가족은 난징에 머물게 됐는데, 그때 사정이 가족 모두 한집에서는 지낼 수 없었다. 난징은 중국의 수도이므로 일본이 여기까지 와 잡아갈 수는 없었겠지만, 백범은 그래도 조심성 있게 신원을 감추며 지내야 될 형편이었다.

임정 어른들 중에는 중국인들과의 접촉이 별로 없어 중국어가 아주 서투른 분들이 있었는데, 백범도 그러했다. 중국은 지역 사투리가 다양해, 예를 들면 광둥 사투리는 거의 외국어나 다름없어 중국 사람끼리도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특히 광둥성 남쪽 하이난섬의 사투리가 아주 심했다. 그래서 백범은 난징에 있는 동안 하이난 사람으로 행세했다. 백범은 신원을 감추기 위해 자싱 피난 때 전세로 사용하던 목선의 촨냥(배 젓는 아가씨) 주아이바오를 난징으로 불러 부부처럼 가장하며 살았다.

그런 처지에 중국말을 전혀 못하는 어머니와 아들들까지 함께 지내기가 어려웠다. 할머니는 물론, 세 살 때 귀국했다가 중국에 다시 온 지 2년도 채 안 된 신도 중국말이 아직 서투른 때였다. 그래서 백범은 누군가 와서 어머니를 도와주길 바랐는데, 할머니가 우리 어머니라면 마음에 맞을 것 같다고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결국 어머니와 나는 35년 9월 아버지만 장시성 우닝현에 남기고 난징에 와 곽낙원 할머니, 신과 함께 네 식구가 1년 가까이 한집에서 지냈다.

난징에 있는 동안 36년 봄 국내에서 작은고모가 사촌형을 데리고 찾아와 몇 달 동안 함께 지냈다. 집도 좁지 않았고, 생활비도 걱정 없었으므로 어머니는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을 두고 떠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으나, 할머니는 “나 때문에 젊은 내외를 너무 오래 떼놓을 수 없다”며 장시로 돌아가라고 고집했다. 15살 된 손자 신이 중국말도 제법 잘하여 시장 보는 것 정도는 문제가 없으며, 취사와 빨래도 남을 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다시 장시성으로 귀환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앞서 말했듯이 1년 반쯤 지나 우리 가족은 후난성 창사에서 다시 백범 가족과 만나게 된다. 창사에서 기차를 타고 우리는 함께 광저우시까지 갔다. 광저우에 도착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임정은 중국 당국과 접촉하는 데 긴요한 사람 등 10여명만 광저우시 둥산구에 있는 베이위안이라는 별장에 차린 청사 겸 숙소에 머물렀고, 가족들은 모두 인근 포산으로 이주했다. 할머니와 신도 포산에 와서 함께 지냈다. 그리고 40일간 기선을 타고 류저우까지도 함께 갔다. 이때 할머니는 81살 노구에 건강이 좋지 않았다. 백범은 아무래도 노모를 가까이에서 모셔야겠다는 생각으로 할머니와 신을 충칭으로 오게 했다. 그때 두 사람은 트럭의 운전대 옆에 앉아 험한 길을 따라 충칭까지 갔다고 한다. 할머니는 충칭에 온 지 불과 서너달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