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8월23일 모스크바에서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와 소련 인민위원회 의장 겸 외무인민위원 몰로토프가 ‘독-소 상호불가침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이 장면을 웃으며 지켜보던 스탈린(오른쪽 둘째)은 히틀러를 끝까지 믿고 있다 41년 6월 독일군의 전면공격을 당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36
임시정부가 가까스로 충칭에 정착하던 1939년 세계 열강은 군국주의 경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소련과 독일은 폴란드를 양분한 데 이어 동유럽 전체를 분할 점령했다. 소련은 39년 11월 핀란드를 침공해, 이듬해 3월에 맺은 휴전조약으로 두 나라 사이의 라도가호를 소련 영토로 편입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강압으로 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 등 발트해 서안 3개국을 소연방에 자진 가입하는 형식으로 병탄했다. 그리고 역시 비슷한 시기에 제1차 대전 때 러시아 영토였다는 구실을 내세워 영유권을 주장해, 루마니아로부터 몰도바 지역을 소연방으로 편입시켰다. 동시에 독일은 제2차 대전을 전후해 불가리아·헝가리·루마니아 등 3개 발칸국가의 독재자들을 통해 발칸반도 북부를 지배하게 된다. 스탈린은 동유럽의 지배지역을 넓힘으로써 국경 수비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곧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음으로써 서부 국경이 안전해졌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리고 나아가 41년 4월 일-소 중립조약을 맺었다. 이때의 스탈린은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했으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등의 이상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일본과의 중립조약 체결로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소련은 안전하다는 망상에 빠진 듯하다. 39년 8월23일 체결된 독-소 불가침조약은 다음과 같았다. 하나, 양국은 독립적으로 또는 다른 나라와 연합해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다. 둘, 조약 당사국이 제3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제3국을 돕지 않는다. 셋, 공동 관심사에 대한 문제점은 서로 접촉해 협의한다. 넷, 두 국가 중 하나를 직접 혹은 간접으로 위협하고 있는 국가집단에 동참하지 않는다. 다섯, 상호간의 분쟁은 협상이나 중재로 해결한다. 조약은 10년간 유효하고 어느 한쪽이 만기 1년 전에 폐기를 통고하지 않는 한 다시 5년간 자동적으로 연장된다고 정했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이 조약을 지킬 것으로 확신한 것이 분명하다. 41년 6월, 조약을 맺은 지 2년도 못 되어 독일이 소련에 대한 공격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미국으로부터 제보받고도 여기에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6월22일 독일은 소련에 대한 대규모 전면공격을 감행했다. 그 이전부터 국제조약을 헌신짝처럼 무시했던 히틀러를 믿고 있었던 소련군은 전선에서 참패를 거듭했다. 그러나 넓은 국토와 39년부터 얻은 완충지역 덕택에 그 겨울 소련은 수도 모스크바의 수호에 성공했다. 독일의 군사력에 비해 소련의 군비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뒤떨어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독일군의 전진을 저지하는 데 약간의 우세를 보인 분야가 있었다. 소련의 윤활유는 영하 40도에서도 모든 장비를 작동시킨 반면, 독일군은 영하 20도의 혹한이 닥쳐오자 작동 못하는 장비가 많았다. 그리고 소련은 당시 가장 성능이 뛰어난 탱크를 보유하고 있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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