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할아버지 동농 김가진의 묘소가 있던 중국 상하이의 터는 현재 쑹칭링(송경령)능원이 됐다. 1960년대 말 홍위병이 봉분과 비석을 파괴하는 바람에 흔적조차 없다. 2005년 후손들이 묘소를 찾았다. 왼쪽부터 증손녀 진현, 필자, 증손녀 선현, 손자며느리 김숙정씨.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37
치장에 있었던 2년 동안은 주석과 국무위원 다수가 그곳에 계셔서 치장 청사가 임시정부의 본부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기념하는 날은 3월1일이었다. 이때가 되면 충칭 시내에 있는 사람들도 이곳에 와서 행사에 참여하곤 했다. 1940년 3·1절 행사가 끝난 지 이틀 뒤 충칭으로 돌아가는 일파 엄항섭의 가족들을 전송하려고 석오 이동녕·성재·우천 등 국무위원과 함께 우리 가족도 치장 버스정류장으로 나갔다. 그날 3월초는 아주 따뜻한 봄날로 일기도 화창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근처 야산에서 소풍을 즐겼는데, 석오가 저녁을 살 테니 천천히 돌아가자고 해서 느지막이 귀가했다. 그런데 그날 좀 많이 걷고 한 것이 과로가 된 듯 석오는 밤부터 병상에 누워 계시다가 열흘 뒤인 13일 세상을 떠났다. 평생 겨레만을 염려하며 살아온 석오는 마지막까지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다. 충칭에 정착한 뒤에는 부주석제를 두어 사실상 임정 업무 대부분을 부주석인 백범에게 맡기고 있었다. 석오는 유언으로 광복진선계 3당만이라도 하나로 통합할 것을 부탁했다. 석오의 장지는 치장강 건너편의 야산으로 정해졌는데, 장례식에는 충칭의 각 정파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했다. 조선혁명당·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의 3당 통합은 석오가 작고한 지 두 달이 채 안 된 5월8일 이루어졌다. 집행위원장에는 국민당 이사장인 백범이 뽑혔다. 사실상 3당의 강령 등에 별 차이가 없었으며, 공동목표가 너무나 명확했으므로 결국 자리 배분이 문제였던 것 같다. 당원 수로는 국민당이 다른 두 당을 합한 수보다 몇 배 많았으나, 합당하면서는 소수당을 특히 더 배려한 듯하다. 그리고 일단 합당이 이루어진 뒤에는 그전의 파벌은 대체로 해체되었다. 정부 수립 직전인 48년 초 나라의 앞날을 놓고 심각한 대립이 벌어졌다. 미국은 47년 말쯤 이미 남쪽에 단독정부를 세우는 계획을 확정시킨 듯했다. 미국의 뜻에 거의 맹종하는 극우파는 이 계획에 찬동했으며, 미국에 의해 초대 대통령으로 사실상 내정된 상태인 이승만 박사도 앞장서서 이 주장을 내세우고 있었다. 남북에 각기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동족상잔의 비극까지 우려되는 상황에서 백범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이런 구상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 무렵 이미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 백범은 모친 곽낙원 할머니를 비롯해 적어도 독립지사 몇 분의 유해를 국내에 모셔올 것을 결심한 듯하다. 백범은 45년 귀국 직후 항일투쟁에 목숨을 바친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세 열사의 유해를 봉환해 서울 용산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원래 안 의사의 유해도 그곳에 함께 안장하려 했던 것인데, 안타깝게도 지금껏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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