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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혁명가’ 조성환이 이끈 임정 군사특파단 / 김자동

등록 2010-02-25 18:59

1940년 9월 충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총사령부 결성식을 마친 뒤 한-중 두 나라 요인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1940년 9월 충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총사령부 결성식을 마친 뒤 한-중 두 나라 요인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38
임시정부는 1939년 봄 치장에 도착한 직후부터 한인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과 인접한 전방으로 군사인원을 파견할 것을 검토했으며, 그해 7월30일 국무회의에서 ‘군사특파단을 중국 모 방면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모 방면’은 내몽골 지역인 쑤이위안성(현재 네이멍구자치구에 속함)이었다. 쑤이위안성은 한인이 많이 살고 있는 랴오닝성과 허베이성과 가까운 곳이었다. 일본이 31년 중국 동3성(만주)을 공격했을 때 중앙군의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헤이룽장(흑룡강)성에서 상당 기간 용감히 저항하다 소련 영내로 후퇴한 마잔산(마점산) 장군 휘하의 동3성정진군사령부가 있었던 우위안(오원)현도 여기에 있다.

그해 10월1일 군사특파단이 치장에서 결성됐다. 단장은 군무부장인 청사 조성환이 맡았으며, 단원으로는 몽호 황학수, 화강 이준식, 왕중량(본명 나태섭)으로 구성됐다. 군무부장 청사의 후임으로는 백산 지청천이 임명됐다. 임정의 군사특파단장을 맡은 청사 조성환 선생은 구한말 육군무관학교 재학 때 부패한 군부 숙청을 시도하다가 사형선고까지 받은, 스무살 무렵부터 활약한 혁명가다. 군사특파단장에 취임할 당시는 임정의 국무위원과 군무부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단원인 황학수도 구한말 무관 출신으로,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이준식(일명 웅)은 중국 윈난성의 강무당 군관학교를 나온 군사지도자로 만주에서 독립군에 참가해 활동한 분이다. 왕중량과 노복선은 중국군관학교 뤄양(낙양)분교의 한인반 출신들이었다.

청사는 중국에 일찍 망명해 오랫동안 머물렀으며, 부인 이숙진 여사가 중국인이어서 표준 중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러나 집에서는 내외가 언제나 우리말로 대화해, 부인 역시 우리말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법도와 풍습에도 익숙해 있었다. 이 여사는 어머니와 같은 연배로서 치장에서부터 이웃으로 지내면서 막역한 사이가 되어 귀국 뒤에도 계속 가까이 지냈다.

임시정부는 40년 여름 치장에 있는 사무실을 정리하고 충칭 시내로 옮겨갔다. 새 청사는 허핑(화평)로 우스예샹(오사야항) 1호로서 구식 2층 건물인데, 그때까지 다른 임정 청사들에 비하면 제법 넓은 편이었다. 임정 식구들도 일부는 그해 가을 충칭 시내로 옮겨갔으나 대부분은 41년 2월 말에야 충칭시 창장 남쪽 강변에서 약 15㎞ 남방에 있는 투차오(토교)라는 곳으로 이주했다. 중국 당국으로부터 전쟁 피난민 정착자금을 지원받아 투차오에서 약 2㎞ 떨어진 둥칸이란 마을의 언덕 위에 같은 모양의 단층집 3채를 지었으며, 전쟁이 장기간 계속될 것에 대비해 농지도 약간 사들여 부식을 해결했다.

우리 가족도 이때 함께 옮겨갔는데, 나는 마침 40년 말에 치장 남쪽 약 3㎞ 떨어진 곳에 있는 차오허창 소학(6년제 초등학교)을 졸업한 직후였다. 집 한 채에 4~5가구가 살았으며, 이 집들은 그 일대의 중국인 농가에 비하면 제법 멋있어 보였다. 집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화탄치라는 개울이 흘렀는데, 보통때는 물이 맑고 수량도 많아 46년 초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5년 동안 그 물을 식수로 썼다. 또한 덥고 습한 곳이라 1년에 8개월가량이나 수영을 할 수 있어 내 또래 아이들에게는 천국이었다. 우리집에서는 개울이 폭포로 떨어지는 모습도 내려다보여 경치가 좋았다. 폭포 아래쪽에는 그늘이 있어 아주 더울 때에는 그 밑에서 수영을 즐길 수도 있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투차오에 살던 가족이 더러는 충칭 시내로 이주했는데,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로 들어오기도 했다. 우리가 투차오로 옮기기 전 치장에 있던 식구 중 상당수는 40년 후반에 이미 충칭 시내 혹은 근교로 이주했다. 관음암에서 합숙하던 내 사촌형 석동을 비롯한 청년들도 시내로 이주했다. 임정에서는 또 중국 당국의 지원으로 임정 청사에서 동쪽으로 멀지 않은 허핑로 옆 후이수이가오라는 골목 안에 단층 연립주택을 지어 시내에 거주하는 임정 가족들을 입주시켰다. 그 주택은 투차오보다 늦게 준공돼, 투차오에 살던 가족 중 일부가 이쪽으로 이주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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