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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일 25%씩 더 해 기부하면 세계 굶주림 사라져”

등록 2010-02-25 19:13수정 2010-02-25 19:16

아흔여섯 한평생을 ‘생명 살리기’와 봉사에 바쳐온 원경선 원장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돈이 지배하는 세상, 돈의 노예가 되는 세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물질문명에서 해방되어 어떻게 바르게 갈까를 생각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경호 기자 <A href="mailto:jijae@hani.co.kr">jijae@hani.co.kr</A>
아흔여섯 한평생을 ‘생명 살리기’와 봉사에 바쳐온 원경선 원장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돈이 지배하는 세상, 돈의 노예가 되는 세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물질문명에서 해방되어 어떻게 바르게 갈까를 생각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풀무원’ 창업자 원경선 원장




“세상의 아름다움 중에서 인간의 아름다움을 딛고 넘어설 만한 아름다움은 없다고 생각한다. 의롭고 아름답게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영상이야말로 모든 것을 초월한 아름다움일지니, 그래서 인간을 그린 조선시대 초상화는 그저 단순한 얼굴그림이 아니다.”

명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남긴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 선생은 생전에 백사 이항복의 초상 앞에서 느낀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평생을 조신한 사람에게 느낄 수 있는 맑음과 깨끗함을 그대로 담은 초상 앞에서 느낀 감동이었을 것이다.

인터뷰를 위해 풀무원 창업자인 원경선(96) 원장과 마주한 날, 조선조 대선비의 초상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조선조의 선비들은 늘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말년에 초상을 남겼다. 자신이 평생 닦은 몸과 마음을 증거하자는 뜻이었다. 그 모습을 담는 화가는 앞에 앉은 이의 참모습, 외면 아래 은은히 비쳐 드러나는 정신까지 표현하기 위해 혼신을 기울였다. 이를 전신사조(傳神寫照)라고 했다. 모든 인터뷰의 꿈도 그러하리라.

전쟁고아들과 만든 농장 ‘유기농 기업’으로 키워
“심해지는 공해 속 사람·자연 살리는 길이라 생각”

경기도 포천이라고 하지만 강원도 철원까지 깊게 들어간 지장산 자락의, 딸 원혜덕씨 집에서 원경선 풀무원농장 원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날, 2월9일엔 겨울을 밀어내는 비가 오고 있었다. 원 원장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평단리의 풀무원농장과 유기농공동체 ‘평화원’에서 보내고, 주말에만 딸 집에서 지내는데, 이날은 서울서 올 기자들을 위해 일부러 포천에 머물렀다고 했다.


상수(上壽·100살)를 4년밖에 남기지 않은 나이에도 인터뷰를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를 깊은 곳에서 카랑카랑하게 치올라오는 음성에서 느낄 수 있었다. 불과 2년 전까지도 농사를 손수 지었다고 했다. 원 원장은 “95살이 넘으니까 몸에 정지신호가 내려온다”고 했다. 그래도 “강연 나가면 아직 쨍쨍한 목소리가 난다”고 했다.

그의 삶이 이렇듯 길고도 건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삶이 ‘생명 살리기’의 한평생이었기 때문이리라. 1955년 농촌공동체로 시작한 ‘풀무원’은 76년 국내 최초의 유기농운동체인 ‘정농회’ 설립으로 이어진다. 그사이 사람을 바로 세우기 위해 경남 거창고등학교 이사장(1960)을 맡았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국내 최초의 국제구호활동단체인 ‘기아대책 한국지부’를 창설했다. 1992년에는 78살의 나이에도 브라질 리우환경회의 글로벌포럼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뒤, 환경단체인 ‘환경정의시민연대’를 세웠다.

인터뷰가 있던 그즈음, 인터넷에서는 큰아들 원혜영 민주당 의원의 기부가 화제가 되고 있었다. 원 의원이 그동안 재산 수십억원을 기부해 왔는데, 정작 자신은 얼마 전 전세금 4000만원을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요구에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지진 대참사가 일어난 아이티에서는 원 원장이 주춧돌을 놓은 기아대책 한국지부의 활동이 이어지고 있었다. 원 원장은 말하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귀가 어두워 딸이 도우미로 함께했다. 원 원장이 미처 마치지 못한 이야기는 딸이 부연했고, 그 내용은 대화 중간에 녹였다.

­원혜영 의원의 기부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데, 읽어 보셨나요? (딸이 “오빠가 20여억원을 사회에 기부하고 정작 자기는 돈이 없어 전세금을 대출받았다는 기사가 났대요”라고 거들었다.)

“응, 혜영이가 무슨 그런 돈이 있어. 없어. 내가 알아. (다시 딸이 ‘풀무원 주식 팔아서 장학재단 만든 거랑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부조금 기부한 거 말씀이에요’라고 하니, ‘아, 그거’라고 할 뿐 별다른 말이 없으셨다.)

딸이 대신 이렇게 덧붙였다.

“아버지랑 살면서 늘 듣는 이야기가, 월급 때면 ‘(사회를 위해) 돈 내놔라. 구체적으로 얼마를 내놓을 것인지 말하라’는 말씀이셨어요. 지금도 가족들이 모이면, 당신 자식들뿐만 아니라 손주들에게도 ‘돈 내놔라’고 하시죠. 저희가 ‘이미 이곳저곳에 내는 곳이 많아요’라고 해도 ‘그래도 너희들이 좀더 내놓아야 한다’고 하세요. 오빠가 장학금을 낼 때 이런 일도 있었어요. 가족들이 ‘이왕이면 지역구(부천 오정구)로 내라’고 했죠. 그런데 오빠는 ‘우리 가족이 다녔던 학교에 내야 한다’며 굳이 원미구(학교)에 냈죠.”

­풀무원의 뜻이 궁금합니다.

“풀무질 있잖아요. 쇠 달구는 풀무질. 그거 하자는 뜻이었어요. 내가 부천에서 청년들을 모아 농사짓기 시작한 곳이 미군 비행장 부근이었어요. 미 군목들을 만날 일이 있었는데, ‘하우스보이(미군부대에서 잡일하던 전쟁고아)들을 보낼 테니 농사도 가르치고 교육도 시키겠느냐’고 했어요. 내가 ‘보내라’고 했지. 그 사람들 모아 일을 시작했어요. 일이 사람을 만드는 풀무질이지요. 쇳덩이가 풀무질로 쓸모가 되듯이. 그래서 이름이 풀무원이에요.”

원경선 원장은 애초 사업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성공한 청년 농장주였고, 중국 베이징에서 인쇄소를 열었던 적도 있다. 해방 후에는 토목건축 사업으로 큰돈을 벌기도 했다. 그러나 불혹이 넘어 그는 새로운 삶을 택했다. 1955년 경기도 부천의 황무지 1만평에서 새 꿈을 담은 풀무원을 지었다. 협업농장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초기에는 구성원의 절반이 고아와 떠돌이, 부랑자들이었다. 원 원장은 오전 한나절엔 성경과 교양 교육을 하고, 오후에는 영농기술이나 양계법을 가르쳤다. 슬하의 7남매도 따로 두지 않고 풀무원 구성원들과 한방에서 자고 한솥밥을 먹게 했으며, 농사일과 허드렛일도 똑같이 시켰다고 한다.

기아대책기구 설립해 성금 모으고 국외 활동도
“젊은이들 돈욕심 버리고 바르게 살 길 고민해야”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유기농을 시작하게 된 계기로 넘어갔다.

“내가 일본을 찾아가 유기농 대부(일본 애농회 설립자인 고다니 준이치)를 만난 일이 있어요. 그 사람이 나를 만나 몇시간 이야기하더니, ‘한국 한번 가보자’고 그래요. 같은 농부라 그런지 뜻이 통했대. 그래서 (한국으로) 초청을 해서 같이 남쪽을 돌아보는데, 갑자기 울상이 돼서 ‘일본이 한국에 못된 짓 많이 했지만, 제발 농사만은 따라가지 마라’고 해요. 그래서 사람들을 불러모아 이야기를 같이 들었지. 고다니 선생은 ‘일본 농업이 한국보다 10년 빠른데, 제초제 독성의 잠복기간이 10년이다. 일본에선 제초제의 해악이 지금 나타나고 있다. 이제라도 제초제를 끊어야 한국 농업이 살 수 있다’ 이런 말을 했지요. 강의 듣기를 원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근처의 양계장에 임시로 자리를 만들어 며칠간 숙식을 해결해 가며 강연을 들었어요. 그리고 유기농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정농회’라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원경선 원장은 일본의 ‘애농회’라는 단체에서 만든 잡지에서 유기농에 대한 글을 읽고, 사람과 자연을 살리는 길은 유기농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1975년 다시 일본을 찾았다. 굶어 죽는 상황에서, 전쟁에서 다치고 죽는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니 이제는 공해로 다 죽게 됐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원 원장은 1976년 경기도 양주로 풀무원농장을 옮겨 한국 최초로 유기농을 시작했다. 여기에서 키운 농산물을 가지고 1981년 5월 서울 압구정동에서 ‘풀무원농장 무공해 농산물 직판장’이라는 조그만 채소가게를 열게 된다. 그 3년 뒤에 ㈜풀무원식품이 설립됐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유기농이란 것이 비싸서 결국 돈 있는 사람만 먹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건강한 먹거리를 마련해야 하나요?

“그런 문제는 안 나와. 돈 없어서 못 사먹는 일은 못 나와. 가치를 몰라서 안 먹는 거지. 우리 집에서 가장 가난할 때 먹었던 것이 현미예요. 방앗간에 가서 벼를 찧으면 쌀겨가 나오고 현미가 나와. 그게 무지 (맛이) 써. 그런데 그게 몸에 그렇게 좋아. 그런 걸 알고 먹어야 해.”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생명의 가치를 안다면 비싸고 싸고를 따지기 전에 생명을 살리는 먹거리를 먹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기아대책 한국지부도 세우시고 기아 문제에 관심이 많으신데, 지구촌의 굶주림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25% 일을 더 하고 그걸 내놓으면 돼요. 60억 인구 중에서 15억명이 굶으니까 우리가 25% 일을 더 하고 그걸 내놓으면 되지. 나 혼자 먹으려고 쌓아두지 말고, 나눠줄 수 있어야 해요. 내가 말하는 공동체가 바로 그런 인류공동체야.”

원 원장은 공동체 운동을 통해 사유재산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각자가 25%씩 더 수확해서 이를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세계를 굶주림에서 건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전쟁도 해결된다고 그는 믿는다. 오직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하다 보니 곳간을 지어야 하고, 곳간을 지으니까 도둑이 생기고, 그 도둑을 막기 위해 군대가 생겼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전쟁도 그 결과물이다.

­‘기아대책’이 지금 아이티에서 많은 활동을 하는데, 이 단체를 세우게 된 과정을 좀 들려주십시오.

“옛날에 미국을 갔다가 일본 기아대책 지부장이 강연하는 것을 듣게 됐어요. 그런데 2초에 한명씩 사람이 굶어 간다는 말에 귀가 번쩍했지요. 그 지부장을 찾아갔더니, 자기가 중남미에서 구제사업을 할 때의 경험을 들려주는 거예요. 먹을 것을 기다리는 50~60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초라한 거지 행색의 남자가 지부장-이름이 간다 목사인데-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더래요, 예수님처럼. ‘간다야, 나 여기 있다. 나 죽 한 그릇만 다오.’ 그때부터 그분은 기아대책에 모든 걸 바치기로 한 거지. 나도 그 말에 절대 공감했지요. 그래서 한국에 와서 기아대책 활동을 시작했지요. 그 활동으로 아프리카를 두 번 갔어요. 아이와 부녀들이 그냥 흙바닥에 주저앉아서, 먹을 것이 없어 흙을 주워 먹고 있어요. 이걸 어떻게 할까 싶었죠. 그래서 내가 늘 강연을 하던 (풀무원) 건강레이디들에게 ‘나 갈비탕 두 그릇만 사주라’고 했어요. 점심 한 끼 굶어서 모으고, 지하철 한 번 덜 타고 모으고, 그 돈으로 돕자고 했지요.”

원 원장은 풀무원 건강레이디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먼저 돈을 모았다. 풀무원 건강레이디는 풀무원의 건강식품을 파는 방문판매원들인데, 원 원장의 강연은 그들 사이에서 최고 인기였다. 그는 강연을 마칠 때마다 ‘여기 나 갈비탕 사줄 사람 손 들어 보라’고 했다. 강연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손을 들기 마련이었다. 그는 ‘그럼 나 갈비탕 두 그릇만 사주오’라고 했다. 그리고 갈비탕 두 그릇 값으로 만원씩만 내라고 했다. 그렇게 처음 기아대책에 쓸 돈을 모았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기아현장으로 날아갔다. 나이를 뛰어넘는 그의 활동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수많은 사람들과 기업들이 국경을 넘는 이웃사랑에 참여하는 계기가 됐다.

“그렇게 모인 돈은 국제기아대책기구로 들어가서, 전부 그쪽으로 가서 현지에 가서 정말 유용하게 쓰이지. 나도 가봤는데, 거기 가면 정말 그 돈이, 흙도 주워 먹는 애들에게 정말 유용하게 쓰여. 빈틈없이 쓰여. 기아대책에서 600명이 선교사로 나가서 그 돈으로 일해.”

­기아대책기구 활동에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어떤 얘기를 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점심 먹을 돈을 절약해서 모아서 보내준 돈, 여러분들이 버스 안 타고 걸어가면서 버스비 모아서 보내준 돈들이 그게 큰 도움이 됐어요. 굶주린 사람들에게, 병든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이 낸 적은 돈의 성의가 여러 가지로 쓰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적은 수고가 많은 사람을 살리고 있습니다. 걷고 저축한 돈들이 모여서 효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결코 헛수고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요즘 젊은이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전반적으로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해방되어야지. 돈의 노예가 되는 세태에서 해방이 되어야지. 어떻게 거기서 바르게 갈까를 생각해야지. 물질문명에서 해방되는 거야. 그게.”

조선의 선비들처럼, 그의 정신도 올곧은 끝에 이르고 있었다.

원경선 원장 약력

1914 평안남도 중화군 출생

1935 황해도 수안공립보통학교 졸업

1955 경기도 부천에 풀무원농장 및 공동체 설립

1976 풀무원농장을 경기도 양주로 옮기고 한국 최초로 유기농을 시작함

1976 한국 최초의 유기농단체 ‘정농회’ 창립

1990 한국기아대책기구 부회장 취임

1992 환경정의시민연대 이사장 취임

1995 유엔 ‘글로벌 500’상 수상

1997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1998 ‘인간상록수’와 ‘인촌상’ 수상

2002 영농조합법인 풀무원농장 원장

인터뷰/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자녀들 교사 많아…2남5녀중 셋째가 원혜영 의원


‘풀무원’ 창업자 원경선 원장
‘풀무원’ 창업자 원경선 원장
원경선 원장은 평소 “한 사람을 키워내는 일은 농사를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평생 농사꾼이었던 그는 농사짓는 마음으로 2남5녀를 튼실히 키워냈다. 자녀들은 대부분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인간농사’인 교직을 택했다.

맏딸 혜옥씨는 결혼해 미국에서 살고 있고, 둘째 혜진씨는 부부교사이며, 셋째는 풀무원식품을 창업하고 부천시장을 지낸 원혜영 국회의원이다. 넷째 혜주씨 역시 교사로 일하고 있고, 다섯째 혜덕씨는 교직을 거쳐 유기농법을 연구하고 있다. 여섯째 혜경씨도 교사로 근무했으며, 막내 혜석씨는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귀국했다.

원 원장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건 재산이 바닥나도 실천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가 1960년부터 이사장을 맡아온, ‘열린 교육’으로 잘 알려진 경남 거창고등학교는 부패한 교육계와 마찰을 빚으며 3번이나 문을 닫을 뻔했다. 그때마다 그는 “타협하느니 차라리 학교 문을 닫는 게 바른 교육이 된다”며 버텼다. 그런 고집으로 그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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