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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한인 항일무장군, 중국 각지 군관학교서 싹터 / 정경모

등록 2010-02-28 18:27

1933년 5월 난징의 중앙군관학교에서 비밀회동을 한 백범 김구(왼쪽)와 중국 국민당의 군사위원장 장제스(오른쪽).  두 사람의 합의로 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 안에 설치한 한인특별반은 이후 임시정부 광복군 설립의 토대가 됐다.
1933년 5월 난징의 중앙군관학교에서 비밀회동을 한 백범 김구(왼쪽)와 중국 국민당의 군사위원장 장제스(오른쪽). 두 사람의 합의로 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 안에 설치한 한인특별반은 이후 임시정부 광복군 설립의 토대가 됐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39
1941년 2월 우리 가족이 저장성 투차오로 이주한 뒤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집 가까이에는 중학교가 없어 15㎞ 정도 떨어진 제스창이란 곳에 있는 리런중학교에 입학하고, 학교 기숙사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투차오 집에는 대개 격주로 왔는데, 토요일에 와서 1박한 뒤 일요일 오후에 학교로 귀환했다. 아열대인 충칭은 1년 중 두세 달을 빼놓고는 모기가 기승을 부렸다. 항시 말라리아(학질)가 창궐했으나, 약품이 부족해 쉽게 치료가 안 될 때가 많았다.

나도 42년 여름부터 말라리아에 걸려 몸이 심하게 약해지고 빈혈까지 겹쳐 1년간 학교를 쉴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몸을 추스르던 때 중국의 명문 칭화대학 출신들이 모금하여 개교한 충칭칭화중학이 우리집 화탄치 건너에 새로 교사를 짓고 이사를 왔다. 나는 43년 9월 칭화중학 2학년에 편입했다.

임시정부는 상하이 시기부터 국제적인 독립 지지를 위한 외교활동과 더불어 무장항쟁도 병행했다. 국내의 항일의병투쟁이 일제의 잔인한 무력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진압당하면서 그 일부는 두만강을 건너 만주지역으로 후퇴해 투쟁을 계속했다. 임시정부는 처음부터 이들 무장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초대 의정원 의장 석오 이동녕, 역시 의정원 의장을 지낸 규운 윤기섭, 국무령 석주 이상룡 외에 청사 조성환, 우당 이회영과 성재 이시영 형제 등은 모두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지도한 분들이다.

31년 일본이 만주를 강점할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 산하의 부대는 거의 저항을 포기했다. 그러나 우리 독립군은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상당 기간 유격전을 계속하다가, 33년 말에 이르러서는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만리장성 이남 중국 관내로 퇴각했다.

임시정부에서는 또한 초기부터 청년들 가운데 상당수를 중국 각지의 군관학교로 보내 후일을 다지도록 했다. 32년 훙커우공원에서 일제의 상하이 침공 원흉을 폭사시킨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각계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열성적인 지원이 줄을 이었다. 중국 정부는 ‘선안내 후양외’ 정책, 즉 내부의 반란을 진압한 다음에 외적에 대항한다는 정책에 따라 만주와 상하이에서 계속 일본에 굴욕적인 양보를 했다.

그러나 그들도 임시정부에 대한 고마움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했다. 백범과 중국의 실권자 장제스 군사위원장은 33년 항일무장세력 양성을 위해 중앙군관학교 뤄양(낙양)분교 안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는 데 합의를 보았다. 한인반은 34년 2월 개설됐으며, 한인 청년 92명이 입교했는데 이들은 그 후 광복군은 물론 조선의용대의 주역이 되었다. 총교도관은 후일 광복군총사령이 된 이청천(지청천)이었으며, 행정은 백범의 측근이며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학생보호계 주임), 안정근(생도계 주임) 형제가 맡았다. 한인반의 공식 명칭은 중국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였다.

그러나 34년 전원 한인이었던 17대는 해체되고 제1대에서 16대로 나누어 편입되어 중국 학생과 함께 수업했으며, 35년 4월 62명이 졸업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이와는 별도로 난징의 중앙군관학교 제10기에도 한인 학생 20명이 입교했다. 후일 광복군의 주요 간부가 된 노태준·안춘생·고시복·최덕신·김동수 등과 백범의 장남 김인(충칭에 온 뒤 서남연합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재학 중 병사)은 뤄양에서 철수해 이 학교에 들어갔다. 이어 11기에도 박기성·진춘호 등 한인 학생 28명이 입교했다. 이곳에서도 한인을 위한 특별훈련반을 두어 동포 청년 42명이 교육을 받았다.


34년, 두 중앙군관학교의 한인을 위한 특별반은 일본의 항의로 계속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들 특별반에서 훈련을 받은 100명이 넘는 청년들은 그 후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의 핵심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 지원하에 조직된 조선의용군에서도 중심적인 활동을 했다. 20년대부터 40년대 사이에 중국 각지의 군관학교를 졸업한 한인은 모두 200명이 훨씬 넘어 각기 중국군 혹은 광복군 등에서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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