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충칭에서 결성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11월17일 시안으로 출발하기 앞서 백범(앞줄 오른쪽 셋째)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41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는 중국 군사위원회 산하에서 활동한다는 조건 아래 창설되었으나, 사실상 상당 부분 중국군의 간섭을 받지 않고 활동했다. 의용대 창설 직후 일본군의 공격으로 중국군이 우한3진(우창·한커우·한양 3개시의 통칭. 현재는 우한시로 통합)을 포기하게 되었을 때, 의용대원 상당수는 최후의 중국군 전투부대가 철수할 때까지 한커우시에 남아서 일본군을 상대로 선전벽보를 붙이는 등의 선무공작 활동을 했다.
요즘 어떤 간행물에서 조선의용대가 마치 전투부대였던 것처럼 쓴 내용을 본 적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비무장이 원칙이었으나, 당시가 전쟁 때인지라 무기 입수가 손쉬웠으므로 대부분이 사사로이 권총 정도는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이 잘못 이해된 듯하다. 그리고 의용대원이었던 약산의 부인 박차정 지사가 직접 전투에 참가해 얻은 부상으로 충칭에서 숨진 것으로 기록한 것도 전혀 사실과 다르다. 1943년으로 기억되는데, 충칭에 있을 때 나는 부모를 따라 강 남쪽 난안(남안)구 단쯔스(탄자석) 쑨자화위안(손가화원)에 있는 약산의 거소를 찾아 위독해진 박 여사를 문병한 일이 있다.
창설 당시의 조선의용대원은 100여명 규모였는데, 총대장은 약산 김원봉이 맡았으며, 2개 구대로 편성됐다. 민족혁명당원으로 구성된 제1구대장은 박효삼이었으며, 전위동맹원을 주축으로 구성된 제2구대장은 이익성이었다. 조선의용대의 최고 지휘감독기구는 10명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중 5명은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원이었으며, 한인 5명은 약산을 비롯해 민족혁명당의 이춘암,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약칭 해방동맹)의 김규광(김성숙), 전위동맹의 최창익 및 민족전선의 비서 한일래 등이었다.
39년 말에 이르러 조선의용대는 대원이 많이 늘어나 조직을 3개 지대로 확대개편했다. 40년 2월 조선의용대에서 발표한 편성 내용을 보면, 대본부 94명, 제1지대(지대장 박효삼) 98명, 제2지대(지대장 이익성) 75명, 제3지대(지대장 김세일) 63명이었다. 합계 330명으로 창립 불과 1년4개월 만에 대원이 3배로 늘어난 것이다. 이렇게 성장한 조선의용대는 중국 6개 전구 13개 성, 각 전선에 배치되어 주로 중국군의 대일 심리전과 포로 심문을 담당했다. 특히 의용대원 중에는 일본어에 능통한 사람이 많았으므로 중국군으로서는 이들의 도움이 아주 요긴했다.
일본군이 중국 연해 각 성의 주요 도시와 철도노선을 점령함에 따라 베이핑(현재의 베이징)·상하이 등 대도시를 비롯해 허베이성·산시성·장쑤성의 각 주요 도시에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 왔다. 이에 따라 민족전선에서는 이들을 포섭하는 데 주력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하여 활동 무대도 화북 쪽으로 집중시킬 필요가 생겼다.
한편 임시정부에서 결성한 특파단은 앞서 말한 핵심 구성원 4명 외에 충칭에서 광복진선 청년공작대 대장 고운기(고진원)와 대원 전태산·노복선·지달수·서파 등을 참여시켜 39년 11월초 시안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시안에 판사처를 설치한 뒤 중국군의 군관으로 있는 노태준·안춘생·조인제·이석화·김자동(필자와 동명이인) 외에 이건우·김광(고영희)·이영어 등도 특파단에 합류시켰다. 특파단은 적군 점령지역 내의 한인을 상대로 한 공작을 위해 40년 6월에는 허베이성과 인접한 산시(산서)성으로 이준식 주임 인솔하에 대원 노태준·안춘생·김광·서파·이영어 등으로 구성된 전진 초모기지를 마련했다.
이와 별도로 39년 11월11일 충칭에서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결성됐다. 류저우에서 결성된 청년공작대는 이제 사실상 해산되었으며, 군사특파단에 합류한 사람과 일부 학업을 계속하는 사람을 빼놓고 대부분 전지공작대에 가입했다. 무정부주의 계열 청년 조직인 남화한인청년연맹들도 여기에 가입했다. 중국 군관으로 있는 나월한이 예편하여 단장을 맡았다. 전지공작대도 결성된 직후 시안으로 출발했다. 이들도 특파단의 지령을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독자적으로 활동했으며, 중국군 제34집단군의 후쭝난(호종남)사령부와 협력하여 별도로 초모공작을 전개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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