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가 1919년 8월 미국에 설치한 워싱턴한국위원회의 초대 위원장 우사 김규식(오른쪽)과 한달 뒤 구미외교위원부로 개칭하면서 위원장으로 선출된 우남 이승만(왼쪽). 두 사람은 임정 초대 외무총장과 외교위원으로서 해방 직후까지 각각 중국과 미국에서 활약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44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충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양대 항일 진영에 대한 중국 정부의 지원 역시 이원화로 굳어지고 있었다. 백범을 통한 임시정부와 한독당에 대한 지원은 국민당에서 했다. 국민당의 실권자였던 주자화와 우톄청(吳鐵城)이 특히 백범을 존경해 임정에 극히 우호적이었으며, 충칭에 있는 동안 두 사람은 임정과 국민당 사이의 창구 노릇을 했다. 다른 한쪽은 약산 김원봉을 통한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에 대한 지원인데, 특히 약산의 황푸군관학교 동문들이 중심이 되어 후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의용대원 다수가 41년 봄 즈음 중국공산당 쪽으로 이동하면서 중국 정부의 정책은 결국 임시정부 지원으로 일원화되는 방향으로 변해갔다. 41년 초 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 우사 김규식 박사가 충칭으로 이주하고, 곧 민혁당의 당수로 선임됐다. 우사는 중일전쟁 초기부터 쓰촨성 성도인 청두(성도)에서 대학교수로 있다가 약산의 권유를 받아 충칭으로 옮겨 난안 단쯔스에 있는 쑨자화위안(손가화원)에 정주한 것이다. 온건 합리적인 우사가 민혁당 당수를 맡게 되면서 민족해방전선계의 임정 참여 논의도 자연 활발하게 진행됐다. 우사의 부인인 김순애 여사는 어머니와 상하이에 있을 때부터 형님, 동생으로 부르는 가까운 사이였다. 어머니는 김 여사가 충칭에서 대한부인회를 재건했을 때 함께 일했다. 우사도 충칭에 온 뒤 아버지와 자주 만나 지난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우사는 총각 시절 서울 청운동의 우리 집으로 할아버지(동농 김가진)를 찾아뵌 일이 있으며, 할아버지가 자신을 사위로 삼을 생각까지 했다며, 아버지에게 “우리 처남매부 간이 될 뻔했어”라고 농담을 한 적도 있었다. 이후 그가 19년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로 참석한 뒤 상하이로 돌아왔을 때 망명을 결행한 할아버지를 몇 년 만에 다시 만나 반가웠던 감회도 털어놓았다. 41년 가을, 충칭에 한 분의 옛 동지가 찾아왔다. 윤봉길 의사 거사 사건에 연루돼 수배된 뒤 39년 상하이에서 일경에 붙잡혀 국내에서 옥살이를 했던 소해 장건상 선생이 어렵게 충칭까지 온 것이다. 소해는 서울에서 3년 동안 옥고를 치르고 만기출옥하자 충칭으로 올 계획을 세웠다 한다. 소해는 배낭을 메고 금강산 구경을 떠나는 등산객 차림으로 서울을 출발했다. 뒤쫓던 형사를 따돌리느라 실제로 금강산을 거쳐 계속 만주까지 갔다고 한다. 만주에서 기차 편으로 상하이까지 간 다음 배편으로 홍콩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충칭까지 온 것이다. 일본이 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홍콩을 점령하기 불과 몇 달 전의 일이었다. 소해의 국내 탈출은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충칭에 있는 우리들은 중일전쟁이 터진 이후부터 국내와는 모든 연결이 끊겨 있던 상황에서 소해를 통해 그야말로 오랜만에 고국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소해가 가져온 새로운 국내 소식은 우리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중국 당국자들에게도 중요한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충칭으로 이전하기 전부터 민족혁명당 등 민족해방전선 계열 정당들에게 임정에 참여하기를 희망했으나 41년 초까지 이 단체들은 관심이 없는 듯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나 언젠간 전쟁이 끝날 것이고, 귀국할 때까지 분열된 상태로만 있어서 안 된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면서 대화의 가능성도 늘어나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연합국과 조국의 장래를 논의할 때 임정이 그 대표가 돼야 한다는 인식도 작용했을 것이다. 좌우 각파에서 모두 존경받는 우사와 소해가 충칭에 온 것도 서로의 접촉에 도움이 되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