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9월 공식 출범한 대한민국 광복군 총사령부는 4개 지대를 편성해 이듬해 봄부터 각 지역에서 본격적인 징집 초모활동에 나섰다. 사진은 항일독립군 출신인 제1지대장 이준식.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45
광복군 제1지대는 1941년 3월 산시성 린펀(임분)현에 징모처 제1분처를 설치했다. 이곳은 40년 초 군사파견대가 전진 초모 활동을 시작했던 곳으로, 지대장 이준식이 직접 이 지역으로 나가 사실상 제1지대 본부가 이곳으로 옮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요 활동 대상 지역은 허난성 북부였다. 제2지대는 이보다 한달쯤 앞서 쑤이위안(서원)성 바오터우(포두)시에 초모기지를 세웠다. 여기도 군사특파단 때 이미 파견됐던 곳이다. 현재는 네이멍구자치구에 속하는 바오터우는 베이징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며, 동북지역 진출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지대장은 공진원(고운기)이었다. 제3지대는 김학규가 지대장을 맡았으며, 화중지역을 활동무대로 정했을 뿐 실제 출발은 미뤄지고 있었다. 이들 지대장 3명은 모두 만주 항일독립군 출신이다. 마지막으로 광복군에 편입된 제5지대는 100여명 정도의 대원이 이미 확보된 상태로 시안에 본부를 두었으며, 중국군 제34집단군과 협동으로 산시성 동남부 타이항(태행)산 지역에서 전지공작대 활동도 계속했다. 제5지대장은 중국군 출신의 나월환이 맡았으며, 대원도 대부분 중국 중·남부지역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광복군의 네 지대는 각각 중국 화북·화중 및 내몽골 지대에 초모처를 두고 활동했으나 뜻했던 성과를 단시일 안에 볼 수는 없었다. 한인이 밀집한 중국 동북지방은 전선과 거리가 멀어 활동이 그곳까지 미치지 못했다. 기타 일본 점령지역에서의 활동도 제한된 성과가 있었을 뿐이다. 이 지역에 사는 한인은 대체로 일본군을 따라온 사람들로 쉽게 접촉할 대상이 못 됐다. 그리고 예속문제 때문에 중국 쪽의 협조는커녕 견제를 받는 형편이었다. 미주동포들의 지원도 한계가 있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기도 어려웠다. 광복군이 어려운 형편임에도 점차 활동을 늘리고 있는 동안 조선의용대에 뜻하지 않은 큰 변화가 생겼다. 41년 3월과 5월 사이에 뤄양시에 집결한 대원 100여명이 공산군인 제8로군 지역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는 중국 쪽뿐만 아니라 의용대 본부에서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해 7월 산시성 동남부의 타이항산에 진출한 이들은 형식적으로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되었으며, 충칭의 본부에 소속된 것으로 존속했다. 그러나 사실상 이들은 본대에 주기적으로 상황보고만 했을 뿐, 옌안에 있는 무정과 최창익 등이 조직한 화북조선청년회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조선의용대와 약산 김원봉은 광복군이 독립된 임정의 부대가 됐을 때 조선의용대의 위상에 미치는 영향을 의식해 사실상 광복군 창설에 부정적이었다. 약산은 중국군관학교의 동창과 선후배 사이에 상당히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어 임정의 노력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41년 봄의 대규모 대원 이탈 사태로 약산은 난처해졌으며, 군사위원회의 신임도 크게 떨어졌다. 이 사태로 인해 중국 쪽은 광복군을 예속시켜야 할 필요를 더 느끼게 됐는지도 모른다. 41년 10월30일 장제스 군사위원장은 위원회의 허잉친(하응흠) 참모총장에게 “한국 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동시에 군사위원회에 예속하게 하고, 참모총장이 직접 통일, 장악·운용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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