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임시정부의 미주위원회 대표로 선출된 이승만 박사(오른쪽)는 당시 워싱턴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한민중동맹단의 미주 대표 한길수(왼쪽) 등 다른 한인단체들의 협력을 거부해 내내 갈등을 빚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46
임시정부는 창립 초기부터 미국과의 관계를 중요시했지만, 실제로 미국 정부와 접촉은 전혀 없이 지내왔다. 초대 대통령으로 우남 이승만 박사가 추대된 것도 그가 미국에서 상당한 활동력을 갖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실제로 대한제국의 패망에는 크게 작용했던 미국이 그 후 한국의 독립 의지에 관심을 보인 적은 없었다. 충칭에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중국 국민정부와 관계가 비교적 잘 정립되자 임정에서는 미국 정부와 재미동포 관계에 주의를 돌릴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정식 승인하려면 적어도 미국과 사전 교감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했다.
임정 어른들은 이승만 박사에게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국 한인사회에서의 명성 때문에 주미한국위원회(대표부)를 설치하고 그를 총책 격인 임정 주미대표로 위촉했다. 이 박사가 임정의 대표로 임명되자 평소 관계가 좋지 않았던 재미한족연합회 등에 속한 인사들도 이 박사를 찾아가 참여할 것을 자청했다. 그런데 이 박사는 사실상 이들의 협력을 받아들이지 않고 몇 안 되는 추종자들만을 거느리고 활동했다.
1942년 초부터 이 박사와 친근한 사이로 지냈던 미국인 로버트 T. 올리버 박사의 기록에도 당시 이 박사의 측근으로 임병직·장기영·이원순 부부 등 몇몇 충직한 추종자들만 거명했을 뿐이다. 그리고 역시 워싱턴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용중·한길수 등과는 불상견의 적대적 위치에 서 있었다. 이 박사가 가까이 지낸 미국인들도 거의 보수적인 사람들이었다.
미국인 친지 중에는 프레스턴 M. 굿펠로라는 예비역 대령 출신의 지방신문 발행인이 있었는데, 이 박사는 굿펠로와 더불어 미 육군부의 재미한인 특무부대 조직에 관여한 일이 있다. 미군은 한인 특수부대를 조직하여 공중 혹은 잠수함으로 한반도에 잠입시켜 철도 등을 파괴할 계획을 세웠고, 여기에 한국계 미국 청년들을 지원시키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약간의 지원자들은 있었으나 미국에서 성장한 한국 청년들이 이런 목적 수행에 적절치 못했으므로 결국 계획은 취소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44년이 돼서야 미국 해외전략국(Overseas Strategic Services)이 임시정부와 접촉해 광복군의 특수부대 조직을 하게 된 것이다.
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이은 추축국들의 대미 선전포고로 제2차 세계대전이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다. 임시정부도 이때 일본뿐만 아니라 추축국들에 선전포고를 했다. 임정은 처음부터 일본과 싸워 독립을 쟁취하고자 창립된 것이었다. 그런데 새삼 다시 선전포고를 한 것은 승전국의 일원으로서 전후문제 논의에 참여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이제 미국에서 이 박사의 활동이 더욱 중요하게 된 것이다.
이 박사는 나름대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그와 반대되는 위치에 있는 김용중·한길수 등과 달리 실제로 미국의 한국정책 주무부서인 국무부와는 이때까지 전혀 접촉이 없었다. 기록을 보면, 태평양전쟁 개시 직후인 42년 1월 초 이 박사는 미국인 친구인 워싱턴의 변호사 존 스태거스, 기자 출신의 제이 윌리엄스와 함께 처음으로 국무부를 방문했다. 그는 코델 헐 국무장관의 특별보좌관인 알저 히스를 만났는데, 히스의 조언은 당시 미국의 외교정책 수립에 상당히 중요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박사는 이때 미국이 나치 점령을 피해 런던에 자리한 유럽 국가들의 망명정부를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임시정부에도 승인과 지원을 해줄 것을 요구했다. 히스는 이 박사가 한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없으므로 불가능하다고 응답했다. 이 박사는 전후 한국의 영도자를 미국이 주관하는 선거를 통해 선출한다는 전제 아래 임시정부를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박사는 이어 소련의 한국에 대한 야욕을 지적하며 미국이 한국을 미리 승인함으로써 소련이 한반도를 차지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히스는 이 박사의 발언을 가로막으면서, 미국의 주요 동맹국에 대한 비방을 듣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국의 미래는 일본이 패망한 뒤에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