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4월18일 미 해군 제임스 둘리틀 중령(왼쪽)의 지휘 아래 항공모함 호닛호에서 발진한 B-25 미첼 경폭격기 편대(오른쪽)의 도쿄 공습은 태평양전쟁 이후 연합국의 첫 승전이자 역습으로 임시정부에도 큰 희망을 주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48
1941년 9월 레닌그라드 봉쇄를 감행했으나 결국 패퇴했던 독일은 42년 봄 러시아 전선에서 다시 공격을 시작해 남부전선 동남부에서는 캅카스 산맥 앞까지 전진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볼가강과 돈강 사이에 있는 스탈린그라드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이 다였다. 독일의 소련 공격이 개시된 지 1년 반도 못 된 42년 11월부터 소련이 완전히 주도권을 장악하고 대반격전을 개시한 것이다. 이 1년 반 동안 유럽에서는 소련이 홀로 독일에 대항해 싸웠으며, 스탈린은 42년 후반에 들어서면서 미·영군에게 프랑스로 상륙해 유럽에 제2전선을 구축하도록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아직 그런 준비가 돼 있지 않았으며, 그해 11월이 되어서야 아프리카 서북부 프랑스령 모로코와 알제리 해안 여러 곳에 동시 상륙하여 제2전선을 구축했다.
태평양전쟁이 터진 이래 가장 통쾌한 승전보는 42년 4월18일 이른바 ‘둘리틀 공습’으로 불리는 미군기들의 도쿄 폭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충칭의 모든 신문이 이 공습을 크게 보도했으며, 임시정부에서도 전쟁의 전환점이라도 맞은 듯이 기뻐했다. 이 공습은 연합국 진영 전체의 사기를 올리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군사작전 면에서는 손실이 매우 컸던 것이 사실이다. 공습에 참여한 폭격기 16대 가운데 한 대만이 소련령에 불시착했으며, 나머지는 모두 추락했던 것이다.
그 20일 뒤 산호해 해전에서의 승전보가 보도됐다. 사실 이 전투에서는 쌍방이 모두 상당한 피해를 보았으므로 일방적인 승리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 해전에서 입은 피해 때문에 뉴기니섬 동남부에 대한 공격을 포기했고, 거침없던 승리 행진도 멈추게 됐다. 그리고 불과 4주 뒤인 6월 초 일본은 북태평양 중심부에 있는 미드웨이섬을 공격·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그로부터 하와이제도는 물론이고, 이어 피지와 사모아제도까지 공략할 전략이었던 것이다.
인류 역사상 최대 해상전투로 기록될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전투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은 알류샨 군도의 서쪽 끝 두 섬을 점령했다. 그리고 태평양 중부에서 마지막 진격을 하고 있었다. 미드웨이섬을 공격하기 위해 일본은 다수의 함재기를 포함한 대형 항공모함, 소형 항모, 수상비행기 전용 항모, 전함,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소형 함정까지 최대의 무력을 동원했다. 여기에 맞선 미 해군은 함재기를 실은 대형 항모 3척과 순양함·구축함·잠수함 등만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강점은 상대방의 암호를 해독하는 기술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 함대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암호 해독으로 일본 해군의 진로를 미리 포착한 미 함재기들은 42년 6월3일, 미드웨이섬에서 800㎞ 떨어진 지점에서 일본 함대를 향해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그런데도 4일 새벽 일본 함재기들이 미드웨이섬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틀 동안 계속된 이 해전에서 일본은 대형 항공모함 4척 모두와 중순양함 1척이 가라앉았다. 미국은 그 전의 산호해 해전에서 이미 손상을 입은 항모 1척을 잃은 정도였다. 이 해전으로 항모 대부분과 더불어 해군 항공대도 전력을 거의 잃었으므로 일본은 태평양에서 공세를 취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제 태평양전쟁의 주도권은 완전히 미국 손으로 넘어갔다.
미드웨이 해전과 비슷한 시기인 42년 여름 독일의 북아프리카 군단은 이집트의 해안선을 따라 알렉산드리아항을 점령하고, 나아가 수에즈운하까지 진격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독일군은 7월에 들어서면서 영국군의 엘 알라메인 방어선을 뚫는 데 실패했으며, 7월 말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영국군이 공세를 취하는 위치에 오르게 됐다. 영국군의 본격적인 반격은 약 3개월 뒤인 그해 10월 하순에 개시됐으며, 파죽지세로 이탈리아령 리비아를 가로질러 독일군을 격파해 나갔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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