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왼쪽)와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오른쪽)는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배, 전쟁과 분단으로 이어지는 우리 근대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51
1943년 11월 카이로 ‘3거두 회담’의 실제적인 주역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였다. 중국의 장제스 주석을 ‘3대 거두’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루스벨트였다. 루스벨트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있기까지 장 주석 영도 아래 중국이 근 5년간 홀로 일본과 전쟁을 했으며,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뒤에도 일본 육군의 반 이상을 중국 전선에 묶어둔 공적을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후 아시아 문제를 다루는 회담에 아시아의 지도자가 참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루스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아시아 문제 처리를 위해 중국이 중요한 몫을 담당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일본을 완전 무장해제시킨 다음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안정되고 민주적인(친서방적인)’ 중국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을 ‘4대 강국’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의 사기를 높이는 것도 고려한 셈이다. 처칠은 중국을 이렇게 치켜세우는 것이 탐탁지 않았던 듯하나, 루스벨트의 구상을 거역할 의사는 없었을 것이다. 카이로회담에서는 한국 문제가 주요 의제도 아니었으며, 논의하는 시간도 길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선언문에 담을 한국 독립의 시기를 두고 초안이 몇 번 고쳐졌다. 11월24일 제시된 미국의 초안에는 ‘가능한 한 가장 이른 시일’(앳 디 얼리스트 파서블 모먼트)로 돼 있었으나, 다음날 루스벨트는 이것을 ‘적당한 절차에 따라서’(앳 더 프로퍼 모먼트)로 고쳐서 제출했다. 이것을 영국이 ‘적당한 절차에 따라서’(인 듀 코스)로 문구를 바꾸자고 한 것이다. 루스벨트의 첫번째 초안은 한국을 독립시키는 것이 지상목표임을 밝힌 것이나, 수정안은 독립에 앞서 다른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영국의 안은 루스벨트의 수정안을 좀더 멋진 다른 표현으로 옮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리 멋진 표현으로 둘러댔지만,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지만 즉시 해줄 수는 없다는 저의를 임시정부의 어른들은 즉시 간파했다. 충칭에서는 한인들이 여기에 대한 항의집회도 열었으며, 임정의 간행물들도 이 안에 반박하는 글을 실었다. 카이로회담에 참석한 장제스 주석은 그 자리에서 한국은 마땅히 독립돼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 우리의 장래에 지대한 영향을 줄 ‘인 듀 코스’라는 구절의 함축성은 파악하지 못한 듯하다. 미·영 두 나라가 한국의 ‘신탁통치’를 이미 논의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던 것이 명백하다. 충칭 한인사회의 반발을 알게 된 뒤에야 그 함축성을 이해한 중국 당국은, ‘선언’은 이미 발표돼 돌이킬 수 없으니 일단 독립을 보장했다는 점을 들어 임정의 반대를 누그러뜨리려고 설득한 것으로 알고 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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