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초부터 광복 이후 귀국 때까지 필자와 임시정부 가족들이 살던 충칭 인근 투차오의 한인촌 터. 2005년 봄 임정 대장정 순례단이 답사했을 때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55
1941년 초 임시정부 가족이 충칭으로 옮겨오기 직전 투차오에서 서남쪽으로 2㎞쯤 되는 둥칸 마을의 언덕 위에 지은 집에서 살게 된 것은 앞서 얘기한 적이 있다. 그러던 중 43년 우리가 사는 집에서 약 300m 떨어진, 좀더 높은 언덕 위에 멋있는 집 한 채가 들어섰다. 이것은 스웨덴의 루터교회에서 우리 한인사회에 준 선물이었다. 2차대전 때 중립국인 스웨덴에서는 항일투쟁 단체인 임정에 정식으로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사실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원조를 주어도 추축국 쪽에서 알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문제가 없겠으나, 이들은 아마 국제법은 그대로 지키려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기독교청년회관’(YMCA)이라고 이름 붙여 우리에게 선물한 것이다. 1층인 이 건물의 앞쪽에는 십자가가 달린 탑이 있으며, 200~300명이 예배를 볼 수 있는 강당이 있었다. 이것을 우리는 실제로 교회로 사용해 일요일에는 몇 안 되는 교인이나마 모여 예배를 봤다. 그러나 이 강당은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때가 더 많았으며, 루터교회에서도 선교의 목적보다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 쓰도록 이 건물을 지어준 것이다. 교회당 바로 뒤편에는 북향으로 작은 방 두 개가 있어 사무실 혹은 숙소로 사용할 수 있게 됐으며, 찾아오는 손님들이 여기에서 묵고 가는 일도 있었다. 44년 초에는 청두(성도)에서 대학교 영어교수로 있다가 이곳으로 오게 된 김윤택이란 멋쟁이 부인이 얼마 동안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지내기도 했다. 중국인과 결혼했으나 이혼한 이분은 중국어와 영어를 다 완벽하게 구사했다. 김윤택은 30대 중반이었는데, 광복군 총사령부의 정령(대령에 해당)대우 비서로 부임하기로 하고 우선 투차오에 잠시 와 있었던 것이다. 이 두 방과 등을 댄 남향에는 제법 큰 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 탁구대를 놓았으므로 나는 매일 여기서 탁구를 즐길 수 있었다. 그 뒤쪽에는 상당히 넓은 폭(앞쪽의 예배당 넓이와 같음)에 훨씬 더 긴 방이 있어 우리가 적당히 칸막이를 해 쓸 수 있었다. 이 구역은 45년 초부터 광복군에서 대원 숙소로 사용하였으며, 칸을 막아 뒤쪽에는 제법 큰 식당과 주방도 만들었다. 투차오에는 가끔 진객들도 찾아왔는데, 그중에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정환범이란 이도 있었다. 지금은 그가 케임브리지대학 출신 박사라는 주장이 그리 믿어지지 않으나, 그때 다들 그를 ‘박사’라고 불렀으므로 그냥 정 박사라고 칭하겠다. 아버지와는 20년대 초 상하이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고 하며, 나는 그를 ‘정 박사 아저씨’라고 불렀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 정부에서 많은 중국 학생들을 프랑스로 데려다 취업시키고 학교를 다니게 했을 때 정 박사도 이에 응시해 프랑스로 간 것은 내 부모도 잘 알고 있었다 한다. 정 박사는 파리에서 공부를 마치고는 영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해 박사까지 됐다고 한다. 그리고 홍콩을 거쳐 30년대 말에 상하이로 귀환, 그곳 프랑스 조계 안에 있다가 국민당 지하조직과 접선이 되어 충칭까지 온 것이다. 임시정부 주변에는 20년 전 상하이에서 그를 알았던 사람이 많았으므로 그가 온 것을 크게 반겼다 한다. 그뿐만 아니라 조소앙 외무부장은 주석에게 말해 그를 외무부 차장으로 영입했다. 임정의 고관이 된 셈인데 그때 임정에는 차장이 없는 부서가 많았다. 정 박사는 그 이후에도 투차오에 자주 들렀는데 그것은 김윤택 여사를 만나기 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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