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프랑스 망명정부 ‘임정 승인’ 이끌어낸 서영해 / 김자동

등록 2010-03-23 19:19

1920년대 말 프랑스에서 만난 이승만(왼쪽)과 서영해(오른쪽). 오른쪽 사진은 서영해가 쓴 한국인 최초의 불어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 표지. 임정의 유럽 외교를 전담했던 그는 백범 암살 이후 프랑스로 돌아가려다 중국에서 실종된 뒤 행적이 묘연하다.
1920년대 말 프랑스에서 만난 이승만(왼쪽)과 서영해(오른쪽). 오른쪽 사진은 서영해가 쓴 한국인 최초의 불어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 표지. 임정의 유럽 외교를 전담했던 그는 백범 암살 이후 프랑스로 돌아가려다 중국에서 실종된 뒤 행적이 묘연하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56




1940년 마침내 충칭 중심의 항일단체가 모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상하이 시기 이후 임정은 비로소 좌우를 망라한 항일투쟁의 중심이 되었다. 임정은 이때부터 국외와 국내, 중국 및 소련 공산당 치하의 항일 독립투쟁 단체와의 연결도 개척해 나갈 계획을 세웠다. 미주지역에서는 이미 이승만 박사가 임정 재미위원부의 위원장으로 임명된 상태였다. 그러나 미국에서 이 박사의 활동은 기대했던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영국 런던에 있는 서영해 선생을 임정의 런던주재 대표로 임명했다.

서영해 선생은 1920년께 프랑스로 유학을 가,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지역 최초의 한국인 유학생으로 알고 있다. 민족의식이 뚜렷했던 그는 임정의 이승만 대통령이 국제연맹 초창기에 제네바에서 활동할 때, 자비를 써가며 보필했다. 그런데 이 박사와는 좋지 않게 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파리에 있으면서 한국에 관한 이야기와 소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저술한 적도 있으며, 본국에서 온 유학생들을 도와주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28년부터는 파리의 자택에 ‘한국연락처’라는 기구를 두고 한국에 관해 소개도 하고 임정과 연락도 하며 지냈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39년 9월1일 독일이 폴란드 공격을 개시하자, 이틀 뒤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은 10월 초까지 소련과 폴란드를 분할 점령했으며, 40년 4월9일 스칸디나비아 공격을 시작해 한달도 못 되어 덴마크 전체와 노르웨이 국토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리고 5월10일에는 서부전선에서 총공격을 개시했다. 독일은 방어가 잘돼 있는 마지노선을 피해 중립국인 베네룩스 3국 국경을 넘어 프랑스 북부에 진입, 파리를 향해 전진했다. 결국 6월14일 파리가 함락되고 프랑스의 저항도 붕괴됐다. 6월25일 발효한 휴전협정에 따라 프랑스의 60%는 독일 군정 아래 놓이게 됐으며, 나머지 40%에는 독일에 순종하는 비시 괴뢰정부가 수립됐다.

파리가 함락되고 프랑스의 저항이 무너지면서 전쟁 초기 기갑사단장에서 전격적으로 국방차관에 발탁된 드골 장군은, 독일과 휴전을 모색하던 페탱 원수가 총리에 오른 6월18일부터 런던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대독 항전 지속을 국민에게 호소했으며, 그의 주도로 런던에 ‘자유프랑스’라는 망명정부가 조직됐다. 런던 체류 프랑스인들에 이어 여름이 가기 전에 아프리카와 인도 연안, 태평양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들이 자유프랑스에 가담했다. 많은 프랑스 청년들이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망명했으며, 국내에서도 애국적인 레지스탕스 조직들이 자유프랑스에 가담했다.

서영해 선생도 이때 런던으로 망명해 자유프랑스 운동에 가담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충칭의 임정에도 전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임정은 그를 런던주재 대표로 임명한 것이다. 서 선생의 활동으로 자유프랑스와 런던에 망명중인 폴란드 정부로부터 임정의 승인을 받아낸 것으로 알고 있다. 프랑스와 폴란드 두 망명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한 사실에 관하여 현재까지 확고한 문헌자료가 없어 의심을 품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데 당시 충칭에서는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나는 그 시기 런던의 정황으로 보아 틀림없는 것으로 믿고 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당시 런던에 망명중이던 프랑스의 거물 정치인으로 루이 말랭이란 사람이 있다. 말랭은 김규식 박사가 임정 대표로 파리에 있을 때에도, 하원의원으로 ‘한국친우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계속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다. 당시 임정에서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나 역시 이들 진보적 프랑스 정치인들의 협력 사실을 근래에 와서야 알게 됐다. 말랭은 제1차 대전 직후 폴란드의 독립을 주장했던 ‘폴란드친우회’ 대표로 있었으니, 런던에 망명중인 두 정부가 임정을 승인한 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다. 서영해-루이 말랭 선생의 노력 덕분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