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6월11일 사이판 공격을 개시한 미군은 약 24일 만에 섬을 탈환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일본군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섬의 북단 프루덴셜힐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투신자살을 택해 죽음의 계곡을 이뤘다. 당시 미 육군 27보병사단이 죽음의 계곡 전투 중 쉬고 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57
제2차 세계대전의 전개에서 1944년 6월은 아주 중요한 한 달이었다. 그해 6월6일 연합군은 드디어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상륙해 서유럽에서의 제2전선을 형성했다. 태평양에서도 연합군은 전진을 계속해 6월15일에는 사이판 공격을 개시했다. 3주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을 섬멸한 연합군은 B-29 폭격기를 위한 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그야말로 최후의 1인까지 ‘옥쇄’했을 뿐만 아니라, 민간인까지도 절벽 위에서 바다로 투신자살을 강요당하는 현장을 미군이 목격하기도 했다. 미국은 일본의 이런 저항을 보면서 본토 공격에서 직면할 수도 있는 살육전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군의 전력은 믿음직하지 않았으며, 원자탄은 아직 탄생하지 않은 44년 말의 상황이었다. 비슷한 시기 북부 버마에서 연합군은 일본의 잔여 병력에 결정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치나 지역의 일본군은 삼면의 포위공격을 받으면서도 78일이나 버티다가 8월 초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철수했다. 이듬해 1월 하순에 일본군은 새로 연결된 인도 레도로부터 옛 랑군~쿤밍 도로와 연결점인 바모를 탈환했다. 연합군이 각처에서 공세를 취하고 있는 동안에도 중국 전선에서는 여전히 일본군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7년째 들어서도록 일본은 중국을 종단하는 핑한(베이핑~한커우)선과 웨한(광저우~한커우)선을 관통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44년 4월 일본은 우선 핑한철도의 관통을 위한 공격을 개시했다. 핑한철도와 중국 화북을 동서로 연결한 룽하이(시안~둥하이) 철로의 교차점인 정저우시로부터 한커우를 향한 공격이 시작된 지 한 달도 못 되어 소기의 목적은 대체로 달성됐다. 그해 6월 초 일본은 제2단계로 웨한철도를 관통시키는 공격을 개시했다. 세 차례나 일본의 공격을 물리쳤던 후난의 창사 방위선이 이번에는 쉽게 무너져 6월18일 창사가 함락됐다. 창사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150㎞ 지점이 헝양~구이린 철도의 시발점이었다. 헝양이 함락되면 여태껏 후방도시로 여겨왔던 광시성의 성도 구이린도 위태롭게 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중국 내 최전선 항공기지인 미군의 제14공군 기지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일본이 창사 공격에 거듭 실패했으므로 안전하다고 여겨왔던 곳이다. 그러므로 창사 함락은 미국을 무척 긴장하게 했던 것 같다. 미국은 유럽 전선의 진전에 따라 본격적인 일본 본토 폭격을 계획하고 있었고, 헝양을 B-29 폭격기의 거점으로 삼을 예정이었던 것이다. 일본군은 8월8일 헝양을 함락시켰으며, 남쪽으로는 웨한철로를 관통시켰고, 역시 철로를 따라 서남쪽 광시성 성도인 구이린을 공격, 점령했다. 그리고 우리가 광둥에서 피란을 떠났던 것과 같은 길을 따라 류저우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11월 중순 헝양~구이린을 지나 남진하던 일본군과, 구이핑에서 북상하던 일본군은 류저우에서 합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충칭을 향해 서북쪽으로 진격했다. 그해 말까지 일본군은 구이저우성의 두산(독산)까지 함락시켰다. 그러나 보급로가 지나치게 길어졌으며, 계속되는 미군의 공습에 일본군은 이제 겨울의 기후조건까지 불리해져 공격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치고’라는 암호명의 이 공격을 통해 8개월 사이 5개 성의 상당 부분을 더 점령했으며 1억 이상의 중국인을 더 노예로 만들 수 있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