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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황해도서 시작된 안 의사 가족과의 인연 / 김자동

등록 2010-03-25 18:48

1909년 하얼빈 의거 이후 안중근 의사의 유족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대부분 국외로 망명해야 했다. 20년 임시정부를 따라 중국 상하이로 이주해 온 가족들. 왼쪽부터 안 의사의 둘째 동생 공근의 아들 우생, 안 의사의 딸 현생, 첫째 동생 정근의 아들 원생, 정근, 안 의사의 아들 준생씨.
1909년 하얼빈 의거 이후 안중근 의사의 유족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대부분 국외로 망명해야 했다. 20년 임시정부를 따라 중국 상하이로 이주해 온 가족들. 왼쪽부터 안 의사의 둘째 동생 공근의 아들 우생, 안 의사의 딸 현생, 첫째 동생 정근의 아들 원생, 정근, 안 의사의 아들 준생씨.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58
1944년 여름, 우리 가족이 투차오를 떠나기 직전 광복군 제2지대장 철기 이범석이 안원생·안연생 두 사촌남매와 미군 중위 한 사람을 데리고 한인촌 둥칸을 찾아왔다. 철기 가족은 우리가 38~39년 광시성 류저우에 있을 때 같은 집에 살았던 사이고, 안씨 남매도 우리 가족하고 가까운 사이였다. 원생은 안중근 의사 삼형제 중 둘째인 정근 선생의 아들로서 그때 충칭 주재 미국대사관에 근무하고 있었고, 연생은 셋째인 공근 선생의 맏딸이었다. 나는 두 분을 형과 누나로 부르며 지냈다. 함께 온 미군 중위는 웨임스라는 사람이었는데, 우리말을 아주 잘했다. 그는 선교사의 아들로 개성에서 자랐다고 했다. 그는 후일 광복군과 미국 중앙정보국의 전신인 해외전략국(OSS)이 협력해 광복군의 적 후방 침투작전을 훈련할 때 관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주로 주말에 놀러 왔는데, 당시 비어 있던 기독교회관 건물도 함께 둘러보고 원생과 나는 탁구도 한 게임 했다. 이들은 한·미 양국의 협력 문제에 관한 교섭 초기의 실무를 맡고 있었던 것 같다.

올 3월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안 의사와 우리 가족은 참으로 오랜 인연이 맺어진 집안이다. 내 조부는 1897년 5월부터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했으며, 그곳에서 1년 가까이 체류했다. 조부는 첫번째 홍씨 부인, 두번째 임씨 부인과 모두 상처한 까닭에 이곳에 있는 동안 세번째 부인 전주이씨와 결혼했는데, 바로 그분이 내 친할머니다. 안 의사의 선친인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의 안태훈 진사는 도내 갑부이자 천주교 신자로 일찍 개화된 분이었다. 안 진사는 집에 사병도 거느리고 있었는데, 동학혁명군 토벌에 참여했으면서도 동학군의 18살 소년 접주였던 백범(그때 이름은 김창수)을 숨겨준 일화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조부와 안 진사가 사병을 강제해산시키는 일로 사이가 좋지 않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라 내 부모도 모르고 있었던 사실인데, 상하이에서 안 의사의 모친, 곧 안 진사의 부인 조마리아 여사에게서 듣고서야 알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때는 옛 이야기로 웃어넘기며 아주 가깝게 지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 부인이 아주 너그러우면서 대의에 밝은 분이었다고 기억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20대 중반의 안 의사는 부친에게 상속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계몽과 육영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민족을 걱정하는 선각자 중 상당수는 나라가 이처럼 수치스러운 처지에 빠진 것이 다 국민이 몽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민족의 출로를 교육사업에서 찾으려 했다. 안 의사도 같은 생각을 했으나 1907년 정미칠조약의 체결로 국권이 더욱 위축되자 무장항쟁만이 남은 길이라고 판단했고, 또 실제 도처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일부 지사들은 만주 혹은 러시아로 망명해 무장혁명 기지 건설을 꾀하였다. 안 의사도 그 대열에 들어 있었으며, 1907년 가을 부인과 두 자녀를 거느리고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했다. 안 의사는 그곳에서 의병 기지를 건립하는 데 참여했으며, 의병대의 참모총장 겸 독립특파대장으로서 항일투쟁에 몸을 던졌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안 의사는 잘 아는 바와 같이 1909년 10월26일 한국 병탄의 총책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사살하고 5개월 뒤인 10년 3월26일 뤼순감옥에서 처형당했다. 그 후 조마리아 여사는 의사의 두 동생 정근·공근을 대동하고 러시아령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시집간 누이 안루시아와 남편 권승복 선생도 비슷한 시기에 만주로 망명했다. 안 의사 가족은 19년 가을 임시정부가 수립된 상하이로 오기까지 러시아령과 만주의 간도지역(현재의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를 오가며 생활했다. 안 의사 가족이 상하이에 도착한 것은 내 조부와 아버지가 상하이로 망명하기 직전인 듯하다. 20년 초 아버지,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상하이 프랑스 조계내 베레로 융칭팡 10호에 정착했을 때, 조마리아 여사가 할아버지에게 찾아와 옛날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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