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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권력 외압의 통로’ 형사수석부장…대가는 ‘승진’

등록 2010-03-28 17:50수정 2010-03-28 18:44

1998년 세상을 시끄럽게 한 국회 529호실 사건을 보면 안기부는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도 국회 내에 비밀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그해 12월31일 여야 간에 용처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던 국회 529호 안기부 연락관실 앞 복도에서 이회창 당시 총재 등 한나라당 의원들이 농성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8년 세상을 시끄럽게 한 국회 529호실 사건을 보면 안기부는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도 국회 내에 비밀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그해 12월31일 여야 간에 용처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던 국회 529호 안기부 연락관실 앞 복도에서 이회창 당시 총재 등 한나라당 의원들이 농성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법원 고위층에 권력층 뜻 전달
대부분 수용…‘높은 자리’ 보상
안기부 조정관 법원 상시 출입
동향보고서 법관 인사에 영향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44. 불륜의 파트너들: 조정관과 형사수석부장

조정관의 일상적인 관리

중앙정보부-안기부는 재판에 개입하거나, 부당하게 압력을 가한 적은 없고, 다만 ‘조정’했을 뿐이란다. 이 조정 업무를 담당한 자가 ‘조정관’인데, 법원에서는 때로 신문사의 출입기자에 빗대어 ‘관선 기자’라 불렀다. 중정-안기부가 조작하거나 부풀린 수많은 사건들도 모두 사법부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조정관은 중정-안기부의 이런 목적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평소에 사법부의 동향을 관찰하고 문제점이 파악되면 사전에 예방하는 구실을 했다. 때로 사법부 전체를 개편하거나, 큰 사안이 발생하면 조정관 차원을 넘어 안기부의 특정 부서나 특별팀이 개입하거나 지휘라인이 움직이기도 했다. 지금 국정원에 남아 있는 사법관련 보고서는 조정관들이 늘 올린 보고서에서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군사독재 시절, 중정-안기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전지전능한 존재였다. 중정이 모든 것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갖는 두려움이 바로 중정의 힘의 원천이었다. 그런데 송씨 일가 사건과 같이 안기부가 중요시한 사건에 첨부된 담당 판사의 신상기록을 보면 놀랍게도 아주 간단한 학력과 경력만 기재되어 있을 뿐이다. 이일규 대법원 판사의 경우 1977년 고영근 목사 사건이나 1981년 홍선길 간첩사건의 판결로 공안당국을 아주 불편하게 했음에도, 안기부의 공판 예정보고에 첨부된 재판부 신원기록 카드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안기부 조정관이 이일규 판사의 성향을 몰랐을 리는 없다. 이 괴리는 어쩌면 안기부 조정관이 정보를 평시에는 자기 손에만 쥐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정보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힘을 키우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들이 작성할지 모르는 보고서는 법관들에게 매우 껄끄러운 고삐였다. 박우동 전 대법관도 소장법관 시절 소신 판결을 한 뒤, “재임명에 탈락하는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서울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며 “중앙정보부나 검찰 기타 정보기관에서 신분평가가 있었다는 불쾌한 소문도 들리고 아무래도 좋은 점수를 얻었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변정수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도 1975년 성동지원장 시절 중정 성동구 조정관이 가끔 방에 찾아왔는데 이런 자들이 출입하는 것이 매우 못마땅한 일이었으나, 이들의 보고서 때문에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고 한다.

공판 상황 보고


1998년 세상을 시끄럽게 한 국회 529호실 사건을 보면 안기부는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도 국회 내에 비밀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독재 시절 중정-안기부는 법원에 자체 사무실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일규 전 대법원장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법원에 안기부에서 ‘주재’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표현을 썼다. 그만큼 그들의 존재는 일상화된 것이었다. 그런데 안기부 직원으로 법원에 출입한 자들로는 조정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안기부가 수사해 검찰에 송치한 사건의 공판이 시작되면, 사건을 수사한 부서의 수사관들이 법정에 나와 공판을 지켜보고 <공판상황보고>를 작성했다. 이들 보고서는 개별 사건의 사건철에 편철되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다.

중정-안기부 처지에서 사법부는 그래도 조심스러운 존재였다. 재판부에 직접, 또는 법원 상층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조정’에 들어가기에 앞서, 안기부원들은 공판을 지켜보면서 혹시라도 무죄 또는 가벼운 판결이 나오지 않도록 조처를 하곤 했다. 한 예로 1981년 9월의 연세대 내 불순 용공조직 사건 공판상황보고(4회)를 보면 다음 공판에 3인의 증인이 채택되었다는 사실이 포함돼 있다. 타자로 된 이 보고서의 말미에는 손으로 이들 증인에 대해 “공판 전 소재 파악 조정 위계임(할 계획)”이라고 쓴 메모가 첨부돼 있다. 증인 중 한 사람은 공판 전날 안기부에 소환되어 “상기 본인은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불순써클에 가담하고, 동 써클을 통해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이론을 터득하고 이에 지향하는 행동을 하여온 사실이 있는 바, 지금에 와서 후회스럽게 생각”한다는 각서를 썼다.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할 것처럼 보이던 증인은 다음날 공판에서 안기부의 뜻대로 유죄 취지로 발언했다.

조정관의 활동 방식

개인에 따라 활동 방식이 달랐겠지만 조정관이 일반 법관들과 자주 접촉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주로 법원장이나 수석 부장판사 등을 통해 간접적인 압력을 가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럼에도 이들의 달갑지 않은 방문을 받았다는 회고도 드물지 않게 나온다. 이일규 전 대법원장도 중정-안기부원이 몇 차례 자신을 찾아온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인사차 왔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런 사람들이 인사차 올 리가 없지”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는 무슨 사건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유태흥 대법원장 시절에 찾아온 사람은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고 호통쳐서 돌려보낸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또 언젠가는 안기부 직원이라며 젊은 사람이 찾아와 위에서 자신에게 퍽 관심을 가지고 있노라고 말한 적도 있다고 한다. 사법 파동 이전에도 정보부원들이 법원에 드나들었지만, 이때 이들은 유신 이후의 ‘조정’처럼 판결 내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보다는 선고기일을 연기해달라거나 판결 주문을 미리 알려달라는 정도였다. 최영도 변호사에 따르면 재판장이 좋은 얼굴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하면 조정관들도 ‘어차피 도청하면 합의내용을 알 수 있으니’ 미리 가르쳐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법관들은 사무실 여직원까지 정보부의 협조자가 아닐까 의심하여 밖에 나가 판결을 논의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때로는 조정관이 아니라 간부급이 직접 판사를 찾아오기도 했다. 1988년 통영지원에 근무했던 문흥수 변호사는 국가보안법 7조 5항(이적표현물 소지)에 대해 위헌심판을 제청하자 지역의 안기부 책임자가 직접 찾아와 ‘불쾌하다’는 뜻을 전했는데 “이때의 좌절감과 분노가 사법부 개혁을 외치게 된 개인적 계기가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서울형사지법 수석 부장판사라는 자리

제5회에서 본 것처럼 박정희 정권은 깐깐한 김제형 서울지법원장을 제거하기 위해 63년 서울지법을 민사지법과 형사지법으로 쪼개버리더니, 66년부터는 규정에도 없는 수석 부장판사라는 자리를 만들었다. 형사수석 에는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편법으로 파견근무 형식으로 임명되었는데, 첫 번째 형사수석은 유태흥이었다. 그는 대법원장으로서는 악명을 떨쳤지만, 홍성우 변호사나 최영도 변호사처럼 그가 수석부장을 맡던 시절 형사지법에 근무했던 인권변호사들은 한결같이 ‘바람막이’ 소임을 충실히 한 유태흥을 ‘훌륭한 분’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가 수석부장으로 있던 시절, 소장판사들은 외압을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소신 판결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수석부장으로 있으면서 정보부가 요구하는 비밀영장 발부 등을 자기 손으로 처리했지만, 정보부나 검찰의 압력이 일선 판사들에게 미치는 것만큼은 최대한 막아냈다고 한다.

유신 쿠데타 이후 형사수석부장의 구실은 크게 달라졌다. 변정수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에 대해 “중앙정보부나 검찰에서 보기에 유신관이 투철하거나 박정희씨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사람, 적어도 검찰이나 중앙정보부에 협조를 잘해줄 것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이었고, 어떤 사람은 “판사나 변호사들로부터 ‘중앙정보부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1980년대에는 형사지법원장이나 형사수석부장이 공안사범이나 시국사범의 양형에 관여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법원장이나 수석부장이 시국사건의 양형을 상의하자고 했을 때 이를 거부하는 법관들은 형사사건에서 배제되었다. 법원장이나 수석부장은 직무상의 상사가 아니라 행정적인 감독관에 불과한데, 법관의 판결에 개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짓을 말썽 없이 잘해내면 유능한 판사, 인품이 원만한 사람이라고 평하면서 더 높은 자리로 발탁”되곤 했다.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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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 시절 법원과 정치권력의 유착이 심해지면서 형사지법은 그 규모가 훨씬 큰 민사지법보다 서열이 앞서게 되었고, 형사지법원장이나 수석부장 출신은 대부분 대법원 판사로 승진했다. 고등법원부장 승진에서도 형사지법 부장판사들이 대거 발탁되는 것이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안기부 조정관들은 형사지법원장이나 수석부장을 통해 안기부의 의사를 관철시켰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기꺼이 안기부의 요구를 수용했다. 만약 안기부가 직접 담당판사에게 압력을 행사했다면, 소문이 날 수도 있고, 법관들도 반발할 수 있겠지만 법원내부를 통한다면 ‘외압’이란 표현이 무색하게 된다. 2005년 이용훈 대법원장 후보자는 국회인사청문회에서 “형사재판을 실제로 안 해보면 그것 경험을 못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놓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외압이 있었다면 아주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그 재판을 직접 담당하지 않은 사람은 전혀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라고 진술했다. 그는 “실제 그런 얘기는 어슴푸레 소문은 돌아다니고 그랬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판사들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권력과 사법부의 불륜은 깊어만 갔고, 그 어둠의 자식들은 자꾸만 태어났다. 94년 서울형사지법이 폐지된 것은 더는 불륜의 고리를 놔두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불륜을 그리워하는 자들은 지금 ‘사법개혁’이란 이름하에 그 시절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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