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10월16일 조선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안중근 의사의 아들 준생(왼쪽)이 이토 히로부미의 둘째 아들 분키치(오른쪽)를 만나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한다고 말하고 있다. 뒤에 선 사람은 당시 조선총독부 외사부장 마쓰자와 다쓰오(가운데)와 아이바 기요시(오른쪽), 통역 촉탁이다. 연합뉴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60
1939년 9월26일 안중근 의사의 아들 준생과 사위 황일청 등 14명의 ‘재상하이 유지 만선(만주와 조선) 시찰단’이 만주를 거쳐 서울로 향했다. 시찰단 단장은 상하이 한인 부일협력자 제1호로 알려진 이갑녕이었다. 일행은 10월7일 경성(서울)에 도착했고, 준생은 15일 조선총독부 관리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의 위패가 안치된 박문사(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를 찾아가 이토의 위패에 분향하고 그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위패도 받았다. 다음날 준생은 이토의 아들과 함께 조선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일본군이 37년 가을부터 상하이를 점령했으므로 일본의 압력을 받아 그런 행동을 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41년 말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상하이의 공동조계와 프랑스 조계에는 일본의 힘이 뻗치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39년 준생과 그의 매부 황일청의 시찰단 참여는 단순히 강압에 의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41년에는 준생의 누나인 황일청의 처 현생도 박문사를 찾아 이토에게 분향 배례했다. 이 부부는 45년 해방 당시 중국 장쑤성 쉬저우(서주)에 살고 있었는데, 황은 이후 교민들의 손에 맞아 죽었다고 전해들었다.
이처럼 안 의사의 자녀들이 어린 나이에 일제의 마수에 걸려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슬픈 사정을 글로 옮기는 것이 마음 아프다. 이런 사실은 대체로 알려진 일이다. 50년 귀국한 준생이 52년 부산에서 병사한 뒤 부인(정옥녀)이 시어머니(김아려)와 자녀(2녀1남)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갔다고 들었다. 이후 내내 조국과 인연을 끊고 지냈는데 최근 안 의사의 손녀와 증손자가 한국을 다녀갔다고 한다. 아버지의 잘못이 있지만 할아버지의 나라를 찾아와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안 의사의 두 남동생은 각기 항일투쟁에 참여했으나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들 중에도 행복한 생활을 누리지 못한 이들이 적지 않다. 정근 선생은 러시아 망명 중 한때는 제정러시아의 군대에 입대한 일도 있으며, 19년 상하이로 온 뒤 11월부터 대한적십자사 부회장을 맡았고, 25년 베이징으로 이주할 때까지 계속 적십자사 일을 보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20년과 21년 사이에는 만주에 파견되어 임시정부와 독립군 조직 사이의 연락을 주관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청산리 전투에 참여까지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안 의사 자신을 포함한 집안 모두가 독실한 가톨릭 신도들인데 정근 선생이 특히 신앙심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고 있다. 상하이에 있을 때 중국의 가톨릭 관계 인사들과도 교류가 많았다 한다. 안 의사의 가족들은 대부분 머리가 아주 좋았으며, 특히 외국어 몇 가지를 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정근 선생도 중국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했으며, 영어와 프랑스어도 상당한 수준에 올랐던 것으로 알고 있다. 상하이에 있을 당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노선에 동조했으며, 임시정부 ‘개조’를 위한 국민대표회의 소집운동에도 참여했고 흥사단에도 가입했다.
정근 선생은 25년 베이징으로 이주했는데, 그곳에서도 중국 가톨릭교회의 영도자 위빈(우빈) 주교와 친하게 지냈다. 그의 둘째 아들 진생은 위 주교의 추천으로 이탈리아로 유학해 이후 외무부에서 여러 해 근무했다. 정근 선생은 베이징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뇌질환에 걸려 여러 해 동안 산둥성 동북부의 위하이위(威海衛·현재는 위하이시) 지방에서 오랫동안 요양을 하다가 35년 당시 수도인 난징으로 와서 다시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이곳에서 백범 선생의 측근으로 활동했으나, 동생 공근 선생에 비하면 적극성이 적었는데 건강 문제 때문인 듯하다.
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정근 선생은 난징에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전선)에도 가입하고, 난징이 위태로워지자 임시정부 대가족과 함께 한커우로 피란했다. 그러나 정근 선생 내외는 임정 가족과 함께 창사로 가는 대신 홍콩으로 갔다가 다시 베트남의 하노이로 이주했다. 그리고 41년 말 태평양전쟁이 터진 뒤 남부의 윈난성 쿤밍을 거쳐 42년에 충칭으로 돌아왔으나 충칭에 있는 동안 거의 활동을 하지 않고 지냈다. 난징에 있을 때부터 그의 장남 원생은 백범의 측근으로 항일투쟁에 적극 참여했으며, 충칭에 있는 동안에 미국 대사관을 다니면서 역시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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