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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백범 장남과 결혼한 안 의사 조카 미생 / 김자동

등록 2010-03-30 19:12

환국해 지내던 경교장 앞에서 1948년 백범이 둘째 아들 신과 맏손녀 효자와 함께 찍은 유일한 ‘3대 가족사진’.(왼쪽) 비슷한 무렵 미국으로 떠나기 전 맏며느리이자 비서 안미생과 백범이 역시 경교장에서 함께했다.
환국해 지내던 경교장 앞에서 1948년 백범이 둘째 아들 신과 맏손녀 효자와 함께 찍은 유일한 ‘3대 가족사진’.(왼쪽) 비슷한 무렵 미국으로 떠나기 전 맏며느리이자 비서 안미생과 백범이 역시 경교장에서 함께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61




안중근 의사의 둘째 동생 정근 선생은 1885년생으로 부인 이정서 여사 사이에 3남3녀가 있었다. 나는 그중 장남 원생, 차녀 미생과 어려서부터 잘 알고 지냈으나 나머지 4남매는 직접 만난 적은 없다. 원생은 고향인 황해도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나이에 러시아와 만주에서 생활하다가 1919년 부모를 따라 상하이로 와 그곳에서 대학교를 졸업했다. 중국의 명문인 자오퉁대학을 다닐 때 축구부 주장으로 활약해, 전국적으로 이름이 꽤 알려진 선수였다. 그는 운동에 만능이었을 뿐만 아니라 공부도 잘했다. 30년대 초 난징에 와서부터는 항일투쟁에 적극 참여했으며, 충칭에서는 미국대사관에 다니면서 광복군과 미군 정보부대(OSS)의 협력에도 일역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43년 초 충칭의 항일 정당들이 모두 임정으로 통합될 때 좌우합작 청년단체인 한국청년회 회장직도 맡았다. 귀국 뒤에는 미대사관에 근무하면서 인천 미 공보원장으로 일했으며, 그 뒤에도 인도네시아 등에서 미대사관 직원으로 근무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바로 밑 동생 진생도 상하이에서 중학교(초중 3년·고중 3년)를 졸업한 뒤 이탈리아로 유학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선박 건조를 전공했으며, 제2차 대전 중 이탈리아의 레지스탕스에도 가담했었다는 말을 들었다. 귀국한 뒤 상하이 체류 때 사귄 친구인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의 소개로 조선공사의 중역으로 취직했다가, 어학 실력이 뛰어나 외무부에 영입됐다. 그는 중·영·이탈리아·프랑스어 외에 라틴어와 에스페란토까지 능통했다 한다. 프랑스 주재 공사와 버마 주재 대사 등을 역임했으나, 전두환 집권 때 해임당해 그 충격으로 병사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밑으로 두 여동생 가운데 언니 혜생은 잘 알지 못하지만, 충칭에서 여러 번 만났던 동생 미생은 10대 소녀 때부터 상하이와 난징을 왕래하며 임정의 연락원으로 일했다. 아마 그때부터 비슷한 임무로 함께했던 백범 선생의 장남 인과 사귀었던 것 같다. 두 사람은 충칭에서 중앙대 재학중 결혼했다. 영어에 능통했던 미생은 44년부터 충칭 주재 영국대사관 산하 공보원에서 근무했다. 그는 미술에도 재능이 있었는데, 딸 효자가 미술을 전공한 것도 어머니의 재능을 받은 덕분인 듯하다.

김인 형은 45년 조국의 해방을 못 보고 충칭에서 결핵으로 짧은 생을 마쳤다. 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할 때 미생은 시아버지 백범 주석의 비서 자격으로 돌아왔다. 그 뒤 47년 여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미대사관에 다니던 오빠 원생이 알선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미생은 충칭을 떠날 때 효자를 외가에 맡긴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 어느 간행물에서, 미생이 46년 4월 <경향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부친 안정근 선생이 “중대 사명을 띠고 조선에 잠입하려고 베이징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해방 소식을 접하게 됐다”고 말했다는 것을 읽었다. 하지만 내가 알기에 정근 선생 내외는 해방 당시 충칭에 있었으며, 그때 사명을 띠고 귀국을 시도했다면 해방 이후의 일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미생의 밑으로 남동생 왕생과 막내 여동생 은생이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일찍 미국 유학을 갔으며, 그 후의 행적은 별로 들은 바 없다. 다만 은생은 백범의 차남 김신 형과 동갑으로, 형이 중국 공군으로 미국에서 훈련을 마치고 귀환하기 직전 미국에서 만난 일이 있으며, 그후 캐나다로 이주했다는 말을 들었다. 김신 형에게 듣기로는 은생도 중국어·영어·프랑스어에 능통했다.

김신 형은 47년 여름 중국 공군에서 예편하고 귀국하기에 앞서 8월 상하이에서 한국구제총회의 회장으로 교민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는 정근 선생 댁에 들렀다 한다. 그때 정근 선생은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하며 외손을 서울로 데려가라고 해서 9월 초 효자를 데리고 귀국했다. 미생도 친정부모에게 ‘딸을 시동생 편에 보내달라’고 부탁한 것 같다. 그러나 효자가 서울에 도착하기에 앞서 미생은 미국으로 떠나고 없었다. 그렇게 해서 백범·김신·효자 3대가 평생 처음으로 한집에서 얼마 동안 지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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