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의 둘째 동생 공근 선생의 자녀들도 상하이 시절부터 임시정부에서 활약했다. 맏아들 우생은 충칭 시절부터 환국 이후까지 백범 김구 주석의 비서로 일했다. 사진은 1948년 경교장에서 함께한 안우생·안미생·백범·장우식.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63
안중근 의사의 둘째 동생 공근 선생과 부인 이인숙 여사 사이에는 3남2녀가 있었는데, 장남 우생, 장녀 연생, 그리고 막내 지생과는 잘 아는 사이였다. 특히 나와 지생은 가까운 친구였다. 우생은 충칭에 있을 때부터 백범 선생의 비서로 일했으며, 해방으로 환국 뒤에도 백범이 서거할 때까지 계속 보필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공근 선생의 가족이 상하이에서 난징으로 이주할 때, 그의 둘째 아들 낙생은 상하이에 남아서 임정의 연락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37년 임정이 또다시 난징에서 철수할 때도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김동수·김인·안미생 등은 모두 떠났으나, 낙생은 프랑스 조계에 남아서 생활했다. 낙생은 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뒤 일경에 체포됐으나 실형은 받지 않았으며, 해방될 때까지 어렵게 지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연생은 충칭에 있을 때도 활기 있는 생활을 했다. 정부 수립 뒤 당시 여성으로는 임영신 상공부 장관 다음으로 고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공보처장 서리까지 지냈다. 그 후 도미한 것만 알고 지내다 60년대 초 반도호텔 커피숍에서 우연히 만났다. 국외 항일지사와 유족들을 정부에서 초청해서 왔다고 했다. 그때 나이 40대 중반쯤 되었을 텐데 백발이었다. 웬일이냐고 했더니 원래 새치가 있었으며, 염색하고 싶지가 않아 그대로 뒀다고 했다. 그러고는 다시 못 만났는데 미국에서 살다가 파나마로 이주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 90살이 넘었을 것 같으니 아직 생존해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생은 충칭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멋쟁이였다. 귀국한 뒤에도 명동거리 최고의 멋쟁이로 알려져 있었다. 홍콩에서 중학교를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이지만, 영어도 잘하고 세련된 모습과 언행으로 소위 ‘마카오 신사’의 표본이라고 할 정도였다. 48년 말쯤으로 기억되는데, 지생이 ‘성시백 간첩사건’에 연루돼 체포당했다. 이시영 부통령과 이범석 총리가 보증을 서서 경찰도 할 수 없이 석방했다고 한다. 성시백은 서울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했으며 접촉 범위가 아주 넓었는데, 아마 지생이 그와 내왕이 있었더라도 간첩은 아니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50년 7월 공산 치하의 명동에서 지생과 마주친 적이 있다. 여전히 중절모를 약간 삐딱하게 쓰고 최고의 신사복을 입고 있었다. 그때 그런 차림을 하고 다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생의 손위 막내누이 금생은 충칭에서 한국청년회 부회장을 맡았으며 광복군의 인면(印緬-인도·버마)특파대 대장을 지낸 한지성과 결혼했다. 한지성은 공산 치하의 서울에서 서울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충칭 시절 그가 한국청년회장으로 있을 때 내 아버지(김의한)는 그 회의 고문으로 있었다. 6·25 발발 직후 서울시민은 대부분 먹을거리가 없어 9·28 수복 때까지 어려운 3개월을 지냈는데, 한지성이 우리 집에 쌀 한 말과 팥 한 되를 보내온 일이 있었다.
우생은 6·25가 터졌을 때 홍콩에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9·28 수복 때 북쪽에서 우생의 가족을 모두 북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어쨌든 그 뒤 우생은 남쪽과는 발을 끊고 지냈는데, 북쪽과는 관계가 유지된 것으로 알고 있다. 우생의 자녀 등 이북에 안 의사의 친척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홍콩을 내왕하는 사람 중에서 우생과 만난 사람도 더러 있었다. 언젠가 내가 홍콩에 갔을 때, 우생을 만나 보겠느냐고 권유한 사람도 있었다. 우생은 동생 지생이 정신병으로 자살했다고 말했다는데, 몇해 전 지생이 미국으로 건너가 중앙정보국(CIA)에서 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능이 출중했던 공근 선생 자녀들은 일찍부터 독립된 생활을 펴나갔다. 그런데 이처럼 서로 적대하며 상반된 길을 걷게 되었으니, 민족적 비극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싶다. 91년 한 일간지에서 우생이 평양에서 사망했다는 보도를 읽었다. 2008년 내가 속해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는 북한의 초청을 받아 평양 근교 애국열사릉과 재북인사묘역에 있는 임시정부 어른들의 묘소를 참배했다. 그때 우생과 최덕신 등 한때 내가 형님으로 부르며 가까이 지낸 사람들의 묘도 그곳에 있는 것을 알게 됐지만, 우리 통일부와 한 약속 때문에 임정 관계자 이외의 묘소는 참배하지 못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우생은 6·25가 터졌을 때 홍콩에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9·28 수복 때 북쪽에서 우생의 가족을 모두 북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어쨌든 그 뒤 우생은 남쪽과는 발을 끊고 지냈는데, 북쪽과는 관계가 유지된 것으로 알고 있다. 우생의 자녀 등 이북에 안 의사의 친척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홍콩을 내왕하는 사람 중에서 우생과 만난 사람도 더러 있었다. 언젠가 내가 홍콩에 갔을 때, 우생을 만나 보겠느냐고 권유한 사람도 있었다. 우생은 동생 지생이 정신병으로 자살했다고 말했다는데, 몇해 전 지생이 미국으로 건너가 중앙정보국(CIA)에서 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능이 출중했던 공근 선생 자녀들은 일찍부터 독립된 생활을 펴나갔다. 그런데 이처럼 서로 적대하며 상반된 길을 걷게 되었으니, 민족적 비극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싶다. 91년 한 일간지에서 우생이 평양에서 사망했다는 보도를 읽었다. 2008년 내가 속해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는 북한의 초청을 받아 평양 근교 애국열사릉과 재북인사묘역에 있는 임시정부 어른들의 묘소를 참배했다. 그때 우생과 최덕신 등 한때 내가 형님으로 부르며 가까이 지낸 사람들의 묘도 그곳에 있는 것을 알게 됐지만, 우리 통일부와 한 약속 때문에 임정 관계자 이외의 묘소는 참배하지 못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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