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월20일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4선에 성공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오른쪽)이 해리 트루먼 부통령(왼쪽)이 지켜보는 가운데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위 사진) 루스벨트는 취임 석달 만인 4월12일 뇌출혈로 급서해 워싱턴에서 성대한 장례식이 열렸다.(아래 사진)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69
1945년 2월 당시 제32대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든 식민지를 다국가적 신탁통치를 거쳐 독립시킨다는 구상을 했으며, 얄타회담에서 이 구상을 처칠 영국 총리와 스탈린 소련 최고인민위원에게 내놨다. 이에 처칠은 화를 내면서 “내가 총리로 있는 한 대영제국의 유산을 한 치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성을 높였다 한다. 루스벨트는 하는 수 없이 신탁통치 대상 지역이 “대영제국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물러서고 말았다. 그리고 몇주 뒤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신탁통치안을 유엔 헌장에 삽입시켰으나, 그 대상은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지역과 추축국에 종속됐던 지역으로 국한시키기에 이르렀다. 결국 아시아의 인도를 비롯한 영국 식민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3개국,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등은 모두 제외되고 오직 한국만이 신탁통치 대상이 된 것이다.
56년 <뉴욕 타임스>가 공개한 얄타회담의 전문을 검토해 보면, 3국 수뇌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다. 처칠은 자국과 맹방인 프랑스의 식민지 해방을 반대한 것 외에 한국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관심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루스벨트는 한국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지식이 아주 부족했던 것이 분명한 반면, 스탈린은 한국 및 20세기 초의 조선과 만주의 국제관계, 그리고 한국인의 독립 의지와 능력을 상당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제52회) 얘기한 대로 루스벨트는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까지 국가의 형태를 갖춘 경험이 없는 필리핀과 한국을 동일시하여, 얄타에서도 한국은 40년 정도의 후견을 거쳐야 독립될 수 있다는 소견을 내놓았던 것이다.
얄타에서 3국 수뇌는 자신의 이해와 관련해서는 적극적인 주장을 내세웠으나 한국은 그런 대상이 아니어서 서로 상대방을 거스르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한국 문제에 대해 루스벨트가 당치도 않은 ‘40년 후견’ 필요성을 제안했을 때 스탈린은 반박을 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의 장래에 대한 합의까지는 없었으나 루스벨트는 마지막으로 “적어도 5년 이상의 후견기간이 필요하다”고 후퇴했고, 이에 대해 스탈린은 “더 짧을수록 좋지요” 정도로 대화를 끝낸 것으로 나타나 있다. 루스벨트는 신탁통치 방식으로 다자의 공동주관 아래 둬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때 한국에 대해 미·소·영·중 4대국이 공동관리하는 문제도 논의 대상이 됐다.
루스벨트는 국제문제에 대해 ‘통 큰’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는 전후문제를 ‘큰 틀’ 안에서 구상했으며, ‘작은 틀’ 안에서 미국의 국익만을 추구하는 국무부 관리들과는 사고의 범위에서 차이가 있었다고 본다. 그는 전후의 식민지 해방에 관심을 가졌으며, 피식민 지역을 어느 한 나라에 위임통치시킨 국제연맹의 처사가 결국 그 지역을 새로운 지배자에게 넘기게 하는 잘못된 것이었다는 인식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국제기구인 유엔의 틀 안에서 다자에 의한 신탁통치를 통해 피식민 국가들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구상했다. 이것이 그에게는 ‘철학적’ 개념이었으며, 이 구상을 하는 데 있어 관리들의 자문을 거의 받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스벨트는 얄타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지 꼭 3개월 뒤인 45년 4월12일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루스벨트가 살아있었더라도 식민제국자들인 영국·프랑스 등 동맹국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그의 ‘통 큰’ 구상이 제대로 실천되지 못했을 것은 명백하다. 그는 또 ‘큰 틀’로 구상만 했을 뿐이지 피식민 국가들에 관한 개별적인 인식은 매우 부족했던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45년 말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의에서 정식으로 채택된 한국의 신탁통치 결정은 사실상 얄타에서 잉태된 것이었다. 미-소 모두 앞으로 벌어지게 될 의견대립은 호혜·친선의 정신에 입각해 잘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희망적인 정신은 루스벨트의 타계와 더불어 끝장이 나버린 셈이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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