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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해방된 한반도, 기쁨과 앞날 걱정이 함께 오고 / 김자동

등록 2010-04-19 20:55

1945년 9월2일 연합군에 대한 항복식에 이어 9월9일 오전 9시 난징에서 중국에 대한 일본의 항복식이 열렸다. 일본 제국파견군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 육군대장(왼쪽)이 장제스의 특파대표인 중국 육군총사령 허잉친 육군일급상장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하고 있다.
1945년 9월2일 연합군에 대한 항복식에 이어 9월9일 오전 9시 난징에서 중국에 대한 일본의 항복식이 열렸다. 일본 제국파견군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 육군대장(왼쪽)이 장제스의 특파대표인 중국 육군총사령 허잉친 육군일급상장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하고 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75
1945년 4월 학도병 일행이 투차오를 떠난 다음날 나도 충칭 시내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5월1일 광복군에 정식으로 부임했다. 그래서 그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내가 해온 한독당 관련 업무가 더 늘어나게 되었다. 광복군에서는 중국 중앙광파(廣播·방송)국과 교섭해 매월 국내를 향한 단파방송을 개시했다. 이때 아버지가 초를 잡은 원고를 현대문체로 다듬는 데 나도 한몫 거들었다. 그러던 중 8월7일 시안에서는 전략정보국(OSS)의 특수작전 훈련을 받은 제1기생 50여명의 졸업식이 있었다. 이들은 광복군 국내 정진대라고 명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제2기생이 입대해 훈련을 받게 됐다. 이날의 행사를 위해 백범은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장군 및 수행원 10여명을 대동하고 시안에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8월8일 소련이 선전포고를 한 데 이어 10일 일본은 중립국을 통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연합국의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연락을 해왔다. 이 소식은 그날 오후 광복군 제2지대에 전달됐다. 이때 정진대원들은 당장이라도 출발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각 개인이 휴대한 무기와 통신장비뿐만 아니라 식량과 위조 신분증도 준비됐다. 일본제 신발을 포함해 그때 국내에서 대부분 입고 있었던 국민복까지도 빠짐없이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의 항복-그 얼마나 기다렸던 일인가? 더구나 죽음의 위험을 앞둔 정진대원들에게는 ‘이제 살았구나!’ 하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범은 이 소식을 듣고 기쁨보다도 아쉬움과 조국의 장래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한다. “미국은 자기 필요에 따라 대일전에 우리와 손잡기로 했으나 앞으로 어떻게 나올 것인가? 대한제국과 우호친선조약을 맺었던 미국이 자신의 국익을 위해 일본의 한국 침략을 돕지 않았던가? 국제관계에서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신의는 믿을 수 없는 것이 상식이다.”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었다.

일본의 패전은 예상돼 있었다. 다만 그 시기가 원자탄 투하와 소련의 참전으로 단축됐을 뿐이다. 충칭의 각 정당이 모두 임시정부에 참여한 상태에서 백범은 국외 다른 지역과도 연결해 항일세력 전체의 통합된 위치에서 조국의 해방을 맞이하려는 구상을 했었다. 미주 지역에는 이승만 박사에게 대표부의 책임을 맡겨 대미 외교활동과 더불어 동포들을 임정 산하에 뭉치도록 하는 임무를 위임했다. 그리고 국무위원들 대부분도 모르게 부주석 우사 김규식 박사 등 몇 분과만 논의, 임정 문화부장이자 국무위원인 소해 장건상 선생을 중국 공산당의 지원을 받고 있는 옌안의 조선독립동맹에 극비리에 파견했다. 그리고 만주에서 항일유격전을 펴다 소련 경내로 후퇴, 재정비하고 있는 지역으로 이근모 선생을 밀파했다. 이 선생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게 된 동포로, 44년에 충칭으로 왔기 때문에 하바롭스크 서쪽에 있는 유격대의 소재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광복군의 국내 정진대 파견과 더불어 임정의 이러한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의 이 박사는 국무부뿐만 아니라 미국에 상주하는 중국의 쑹쯔원 외교부장의 신임도 받지 못했다. 재미동포의 단결을 위해서도 노력하지 않았다. 소해 선생은 옌안에서 독립동맹의 백연 김두봉 위원장과 오랜만에 만나 옛정을 나눌 수 있었다. 백연은 백범과도 가까운 친구였다. 백범의 부인이 상하이에서 별세했을 때 한글학자인 백연이 한글로 묘비명을 짓기도 했다. 그런데 소해가 옌안에 도착한 순간 일제의 항복 소식이 전해져 두 사람은 항일투쟁을 위한 협력을 논의하지도 못하고 말았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이근모 선생은 몽골인민공화국을 거쳐 소련령으로 향하는 도중 내몽골 지역에서 해방의 소식을 들어 결국 발길을 돌렸다. 이 선생은 그 이듬해 광복군 제2지대와 함께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후 행방은 알지 못한다. 임정의 어른들은 일본의 항복을 반기면서도 모두 조국의 앞날에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8월15일 저녁 임정 청사 근처에서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16일 새벽 1시쯤 집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일찍 주무시는 편이었으나 이날은 그때까지 아버지와 사무실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 승리의 기쁨과 함께 장래에 대한 걱정이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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