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5일 충칭을 떠나 환국 여정에 나선 김구 임시정부 주석(가운데)이 상하이비행장에 도착하자, 필자의 부친 김의한 선생(맨 왼쪽) 등 9월에 먼저 와 있던 임정 화동지구 선무단과 동포들이 영접하고 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77
1945년 8월15일 일제의 갑작스런 항복 소식에 임시정부는 무엇보다도 귀국을 서둘러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중국 정부뿐만 아니라 서울을 점령한 미군 당국의 동의와 협조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한편 중국에서도 할 일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일본군에 끌려왔던 한인 청년들이 ‘전쟁 포로’로 취급받지 않도록 해야 했다. 임정은 중국 당국과 교섭해 원칙적 합의에 쉽게 이르러 광복군에서 각 지방 군부와 협력해 한인 사병들을 분리시켜 별도로 수용하게 했다.
그리고 조속한 귀국을 알선하는 한편, 활동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으며, 때로는 광복군에 편입시키기도 했다. 또 하나는 중국 각지에 있는 교민의 신변과 재산을 보호하는 문제였다. 중국 당국도 일제에 철저히 협력해 많은 축재를 한 극소수를 뺀 한국 교민들의 재산을 보호한다는 것을 약속했다.
임정에서는 동북, 화북 및 화동과 화남지역에 교민 선무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우선 상하이에 화동지구 선무단을 보내기로 했다. 아버지(김의한)와 조시원 선생이 책임을 맡았다. 아버지는 광복군 업무를 부하에게 맡겼다. 그리고 한독당의 업무는 일단 중단하고 정리하여, 문서는 대부분 임정 내무부장인 우천 조완구 선생에게 넘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상당 부분을 우리 가족이 갖고 귀국했다. 아버지와 조 선생은 9월 초순 상하이를 향해 출발했다.
그 무렵 나는 충칭의 한 극장에서 미군이 서울로 진주하는 장면을 담은 뉴스 영화를 보았다. 시청에서 중앙청까지 미군이 행진하는 것을 보면서, 어릴 때 잠깐 들러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던 서울이 제법 잘 정리된 현대적 도시라는 생각을 했다. 군중들이 열렬히 환영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일장기를 내리는 장면에 군중은 더욱 환호했으며 나도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했다. 그러나 올라가는 것은 태극기가 아니라 성조기였다. 군중들의 반응은 화면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일본은 패전과 함께 물러갔지만 그것으로 독립이 온 것은 아니었다.
충칭에 있는 동안 여러 경로로 국내 소식들이 들려왔으며, 임정 청사에서는 그 소식을 게시판에 올리기도 했다. 9월6일 국내에서는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됐다. 여운형 부주석, 허헌 총리, 김구 내무부장, 김일성 국방부장 등이 선출됐다. 이 소식은 신속히 충칭에 전달됐다. 임정에서는 이 사태에 분개하는 분위기였다. ‘인공’ 수립의 주역으로 알려진 몽양 여운형 선생은 당시 상당히 주저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변의 좌경인사들과 조선공산당 출신들이 그냥 밀고 나가 기정사실화한 것 같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상하이 시절 백범과 몽양은 교민회·노병회 조직 등을 함께 했던 동지였다. 그런데 임정의 존재를 무시하고 인공을 선포해 해방 이후 두 사람의 협력을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상하이로 떠난 뒤 나는 어머니(정정화)와 한독당사에 딸린 숙소에서 한달 가까이 더 머물렀다. 귀국 날짜가 머지않았다는 생각에 나는 진학을 포기했다. 더위도 좀 수그러졌으므로 어머니와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작별인사를 했다. 우리가 투차오로 떠난 뒤 함께 귀국 못하면 오랫동안 격조하게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때 충칭에서 헤어진 뒤 다시 못 만난 사람들도 있다.
민족전선 계열의 가족은 대부분 충칭 남쪽 강 건너 난안 단쯔스라는 곳에 쑨자화위안을 중심으로 살고 있었다. 이 집 울타리 안에 살고 있던 우사 김규식, 약산 김원봉, 우강 최석순 등 여러 분의 가족을 방문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운암 김성숙(당시는 김규광)의 집도 그 근처에 있었는데, 운암의 중국 부인 두(杜) 여사는 그때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투차오의 옛집으로 돌아온 것은 10월 중순쯤 되어서였던 것 같다. 투차오에는 38년 초부터 함께 지내온 여러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성인 남자 대부분은 임정 혹은 광복군의 일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투차오에는 대부분 가족들만 남아 있었다. 임정에서 마련한 집 세 채 중 맨 아래채에는 엄항섭 선생의 가족, 신환(건식) 선생의 가족 및 의사 유진동 선생의 가족이 여전히 살고 있었다. 웬만한 친척보다도 훨씬 가까이 지내온 이웃들이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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