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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가족처럼 지냈던 박종길과 한필동 / 김자동

등록 2010-04-22 21:32수정 2010-04-27 18:10

1939년 11월 충칭에서 결성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원들이 파견되기 앞서 찍은 환송식 기념사진. 애초 독립군 오광선 선생의 맏딸 오희영씨로 알려진 뒷줄 왼쪽 세번째 인물은 평지성 대원의 부인이라고 필자(김자동)는 기억했다.
1939년 11월 충칭에서 결성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원들이 파견되기 앞서 찍은 환송식 기념사진. 애초 독립군 오광선 선생의 맏딸 오희영씨로 알려진 뒷줄 왼쪽 세번째 인물은 평지성 대원의 부인이라고 필자(김자동)는 기억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78




1945년 10월 어머니와 내가 투차오(토교)로 돌아갔을 때, 둥칸 마을에는 여러 해 동안 가족같이 지낸 이웃들이 남아 있었다. 민필호·최동오·오광선·이준식·이광 선생의 가족 등과도 아주 친한 사이였다. 여기에는 내 오래된 친구들도 있었다. 엄항섭 선생의 큰딸 기선과 아들 기동은 자싱에서부터 한집에서 살아온 사이였다. 민필호 선생의 딸들, 오광선 선생의 둘째딸 희옥, 최동오 선생의 둘째딸 종화, 이광 선생의 셋째와 넷째아들 복영(귀국 뒤 윤중으로 개명)과 천영 등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어릴 때부터의 친구들이다. 이제 이들 중에는 죽은 사람도 있고, 6·25 때 행방불명된 사람도 있다. 그리고 중국이나 미국에 사는 친구도 있다. 이제는 수원에 살고 있는 오희옥하고만 1년에 한번쯤 만나고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기독교청년회관에는 광복군 토교대라는 이름의 대원 30~40명이 합숙하고 있었다. 청년회관은 우리 집에서 200~300m 떨어진 언덕 위에 있었는데, 나는 매일 그곳에 올라가 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들의 대부분은 일본군에 징집당했다가 탈주한 사람들이었는데, 학도병 출신 한필동씨가 우리 집에 자주 들렀으며 가까이 지냈다. 충남 홍성 출신의 필동 형은 일본 오사카외국어전문학교를 다니다 학병에 강제로 끌려와 중국전선에 투입됐다고 했다. 그는 영어를 전공했으며, 중국어를 부전공으로 했다. 그래서 중국말을 제법 했는데, 내 영어 공부도 지도해 주었다. 중국말을 했기 때문에 일본군에서 중국 후난성 헝양 근처의 포로수용소에 배속되었다. 포로 중에는 중국군 소장도 있었는데, 그는 이 사람의 부탁으로 중국군 지하조직과 연결을 하게 되어 중국 유격대의 도움으로 포로들의 집단탈출을 계획해 함께 중국군으로 넘어왔다. 그렇게 광복군이 된 것이다.

귀국한 뒤에야 그가 유관순 열사의 이질(사촌언니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필동 형의 어머니 유예도 여사는 유관순 열사와 함께 천안 근처 아우내 장터의 시위를 주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유 여사는 일본 당국의 수배를 받게 되자 홍성의 한 목사 집으로 피신하여 공소시효가 끝날 때까지 숨어 있었다 한다. 그러는 동안 한 목사의 동생과 결혼해 필동을 낳게 된 것이다. 필동 형은 학병에 나갈 때부터 탈출을 미리 생각했다고 한다. 귀국한 뒤에도 우리 집에 자주 들렀는데, 6·25전쟁 직후 그가 헌병대장으로 있을 때 내가 찾아가 만난 일은 있으나 이후 일체 우리집에 발길을 끊었다. 그러다가 60년 4월혁명 뒤 정릉에 있는 우리집으로 찾아와 어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어머니는 반갑기는 하면서도 “필동이가 웬일로 나를 다 찾아왔냐?”고 핀잔을 줬다. 그러자 그는, 백범 선생이 암살됐을 때 사복을 입고 경교장에 문상을 갔는데, 특무대장으로 악명 높은 김창룡이 그것을 갖고 트집을 잡았다며 군인으로서 몸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제대한 뒤 미국으로 이민하여 그곳에서 별세했다는 말을 들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광복군 토교대 대원 중에서 우리 가족과 가장 오래도록 가까이 지낸 사람으로는 박종길 형을 들 수 있다. 영양이 고향인 종길 형은 징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사람이다. 특히 그는 투차오에 있을 때 장티푸스에 걸렸는데, 어머니가 우리집으로 데려와 탕약도 끓여주고 식사도 수발했다. 그는 이때 일을 몇십년이 지난 뒤에도 이야기하며 어머니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귀국 뒤 고향에 내려가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46년 10월 그가 가족과 함께 찾아왔다. 당시 우리는 혜화동 작은아버지 집에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는 방이 여유가 있었다. 당장 갈 곳이 없는 듯하여 방 하나를 내주고 거기에 묵게 했다. 그는 고향에 가보니 왜놈 앞잡이를 하던 놈들이 독립촉성국민회의 등을 조직하고, 역시 일제 앞잡이 출신인 공무원이 그대로 자리를 차고 있어 반발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경북 일원에서 이른바 10월봉기가 일어나자 반대세력을 모두 빨갱이로 몰아 잡아들이고 있어 일단 서울로 피신했던 것이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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