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19일 서울운동장에서 임시정부 환국 환영준비위원회가 마련한 ‘임시정부 환국 봉영회’에 참석한 김구 주석(왼쪽부터)과 김규식 부주석, 엄항섭 선전부장 등이 단상에 앉아 있다. 미군정은 애초 임정 요인들의 귀국 일정을 공개하지 않아 이들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 아무런 환영을 받지 못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79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등 일행은 1945년 11월, 해방이 된 지 3개월 뒤에야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것도 임시정부의 공식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이란 조건이었다. 미군 당국의 협력 없이는 귀국이 불가능했으며, 귀국을 계속 지연시킬 수도 없는 처지였다. 11월5일 충칭을 출발하였으나 제1진은 11월23일에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제2진은 1주일 뒤에 귀국했다. 미군정에서 임정 일행의 귀국을 비밀에 부쳤으므로 공항으로 아무도 마중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기대와 달리 임정 영도자들의 귀국 소식이 전해지자 이내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다.
주미 임정 대표인 이승만 박사는 9월16일 먼저 귀국했다. 미 국무부에서 그에게 여권을 내주었으나, 그의 귀국에 특별히 배려한 것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그의 귀환을 환영했다. 이 박사의 친지이며 그즈음 현역으로 복귀한 프레스턴 굿펠로 예비역 대령이 중개자 노릇을 했던 것이다. 굿펠로를 통해 이 박사와 맥아더 장군 사이에 전신이 연결됐다. 두 사람은 반공·반소에 공감했기에 뜻이 잘 맞은 듯하다. 이 박사가 도쿄에 도착했을 때 하지 주한 미군사령관이 그곳까지 마중 나갔는데, 맥아더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임정 일행이 귀국했을 즈음 국내 정세는 이미 좌우가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온건좌파 지도자인 몽양 여운형 선생은 앞서 언급한 대로 인민공화국 정부의 수립 건 때문에 대화가 되기 힘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좌익이 인공 정부를 지지한 데 반해 보수진영은 임시정부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공언했다. 그러나 임정이 귀국해 보니 가장 강력한 우익정당인 한국민주당은 부일 협력자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45년 12월27일, 미·영·소 3국 외상은 모스크바에서 한국문제에 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 주요 내용은 한반도를 미·영·소·중 4개국의 신탁통치 지역으로 삼은 것이었다. 그리고 4대국 관리하에 임시정부를 세워 점차적으로 권력을 이양시키며, 최장 5년 안에 완전독립을 시킨다는 것이었다. 최단시일 안의 독립 보장이 아닌 5개년이란 시효와 제1차 대전 뒤의 위임통치를 연상하는 신탁통치에 대해 대다수 국민은 반사적으로 즉시 반발했다. 충칭에서 이 소식을 들은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에 와서 보니 모든 것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대로 진행되는 것이 당시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길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좌익은 나름대로 결정 내용을 검토한 결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보수진영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한민당의 실권자인 고하 송진우 선생은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태도를 취했다. 동아일보 사장 자리를 겸하고 있던 고하는 아마도 3상회의 협정 전문을 입수해 검토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사실 신문 지면만으로는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 당시의 실정이며, 강력히 반탁을 주장한 사람들도 대부분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민족적 자존심’에서 우선 반대하고 나섰다고 볼 수 있다.
고하는 12월30일 자택에서 자객의 손에 암살당했다. 자객 한현우는, 당시 서울시내 모처에 청년 여러 명이 합숙을 하고 있으며, 그들이 회색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처결하겠다고 공언하고 지냈다 한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적어도 경찰당국의 묵인 없이는 활동할 수 없다고 본다. 한현우는 6·25 혼란기에 풀려나 일본으로 밀항했다. 일본에서 그는 극우단체의 비호 아래 생활했으며, 5·16 이후에는 이들 일본 우파와 박정희 군사정권 사이의 협력을 알선했고, 청와대까지 출입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고하가 죽은 뒤 이 사건이 마치 백범의 소행인 것 같은 유언이 조직적으로 퍼졌다. 나는 60년대부터 고하의 사위와 잘 알게 되었는데, 그도 당시 고하의 가족들까지도 백범을 한현우의 배후로 믿고 있었음을 시인했다. 이러한 유언도 경찰 같은 조직에서 의도적으로 퍼뜨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표면적으로는 임정을 지지하면서 우파는 이때부터 임정과 백범을 음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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