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 3년 만인 1922년 별세해 중국 상하이 쉬자후이 프랑스 조계 안의 만국공묘에 묻힌 동농 김가진 선생의 묘소. 문화혁명 때 묘비가 파괴되는 바람에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81
1946년 1월30일 충칭을 떠난 지 2주 만에 일행은 웨양(악양)에 도착했고, 이튿날 난징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웨양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그곳의 명승인 웨양(악양)루를 구경하고 호변을 산책할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 배는 창장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는 것이어서 2월1일이면 한커우(한구)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역풍을 만나 2일 아침에야 목적지에 닿았다. 이날은 음력으로 병술년 1월1일이었다. 한커우에서 우리는 몇몇 동포들의 집에 분산해서 지냈다. 2월15일 기선 편으로 한커우를 출발해 난징 시내 북쪽 창장강변에 있는 관문인 샤관(하관)에 도착한 것은 18일 오후였다. 난징은 어머니와 내가 35~36년 사이에 1년 남짓 살던 곳인데, 시내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다음날 오후 2시 샤관에서 기차 편으로 상하이를 향해 출발했다. 기차는 9시간을 달려 그날 밤 11시에 상하이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임에도 제법 많은 동포들이 자베이(갑북)역에서 우리 일행을 맞이해줬다. 바로 26년 전 어머니(정정화)가 조국을 탈출해 처음 상하이에 내린 그 기차역이었다. 그런데 마중 나온 사람 중에 아버지(김의한)는 보이지 않았다. 한커우에 도착했을 때 우리 일행은 120여명이었는데, 상하이에 왔을 때는 한커우의 동포들이 합류해 200여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이들은 다음날 아침에야 한인회에서 마련한 한국기독교회관의 합숙소에 여장을 풀 수 있었다. 마중 나온 사람 중에는 김규식 박사의 며느리(아들 김진동의 부인)와 그의 동생도 있었다. 마침 김 박사의 부인 김순애 여사는 기차를 탈 때부터 우리 옆자리에 앉아 왔으며 도착해서도 함께 내렸다. 그의 며느리는 우리 가족과 그동안 치장과 충칭에서 동고동락하며 지낸 임의택 선생의 딸로, 어머니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아버지가 그날 밤 바쁜 일이 있어 대신 임 여사에게 우리 가족이 그 집에서 하룻밤을 묵도록 부탁해 놓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다음날 아침에야 김진동의 집으로 왔다. 그러나 오전부터 손님들이 김순애 여사를 찾아왔고, 거의 모두 어머니와도 잘 아는 사이라 그럭저럭 점심이 지나서야 아버지의 숙소로 옮겨 갈 수 있었다. 아버지의 숙소는 윤봉길 의사가 32년 거사를 했던 훙커우공원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우리 일가인 창강 김인한의 댁으로, 일본인들이 주로 살던 지역이어서 그 집도 일본식 3층건물이었다. 우리 가족이 한커우에서 2주간 머물렀던 일본식 주택과 마찬가지로 방에는 다다미가 깔려 있었다. 2층에는 창강 아저씨 내외분과 두 아들이 있었으며, 3층은 우리가 사용했다. 38년 초 장시성을 떠난 뒤 우리는 언제나 단칸살이였다. 그런데 여기는 2, 3층 각각 침실 둘에 부엌이 따로 있었다. 부엌에는 평생 처음 보는 도시가스까지 있었다. 아래층은 두 집에서 함께 응접실로 사용했다. 그야말로 호화주택에 살게 된 기분이었다. 상하이에서 우리는 약 2개월 머물렀는데, 어머니는 그동안 헤어졌던 옛 친구와 동지들을 만나느라고 매일 바빴다. 내가 태어난 아이런리 1호도 들러봤으며, 대부분 옛 친지들도 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다. 14년 만에 상하이에 돌아와 보니 항일 동지 중에는 변절한 자도 있었으며, 생활고 때문이지만 아편장사로 타락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고생을 견디면서 절개를 지키며 지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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