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가족은 해방 이듬해 귀국해 서울 혜화동에 정착했지만 6·25 전쟁이 터진 직후 아버지(김의한)가 납북되면서 또다시 이산가족이 됐다. 당시 연로한 시어머니를 모시느라 피란을 못 간 어머니(정정화·사진)가 돈암동에 있던 큰고모(김영원) 집에서 지낼 때의 모습이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82
1945년 12월28일 발표된 미·영·소 3국 외상회의 결정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의견 차이로 국론은 극도로 분열되었다. 이른바 ‘신탁통치’는 미국이 구상한 것을 45년 2월 초 얄타회담에서 처음으로 논의된 것이다. 그리고 그해 말 번스 미 국무장관의 요청으로 열린 모스크바 3상회의도 미국이 ‘한국의 독립정부 수립’을 위해 주선한 것이다. 여기서 합의된 주요 내용은 미·소 공동위원회를 통해 통일임시정부를 조속히 수립하며, 5년 안에 한국이 독립되도록 4대국이 공동관리(신탁통치)한다는 것이었으나, 제1차 대전 후의 ‘위임통치’를 연상하는 ‘신탁통치’란 용어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문제됐던 것이다. 그때 신탁통치 반대론자들이 지지자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합의점을 찾으려 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친일 경력으로 그동안 ‘반민족적’이란 낙인에 수세로 몰렸던 일부 세력은 이 기회를 이용해 좌익을 ‘반민족적 빨갱이’로 몰아세우는 호기로 삼기도 했다. 만약 우리의 영도자들이 그때 오스트리아의 좌우 정치인같이 미·소가 다 용납할 수 있는 타협적인 정부를 세울 수 있었다면 사정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3상회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미·소는 ‘한국의 독립’에 성의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의 분할점령에 선뜻 응한 소련에 이어 4대국 중 3개국이 ‘친미’인데도 신탁통치안에 동의한 것은 한반도에 대한 영토 야욕이 없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적어도 한국에 반소 체제의 수립은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의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46년 3월20일부터 5월6일까지 서울에서 열렸다. 소련은 3상회의 반대자들은 협의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은 미국이 제시한 타협안이 채택되어, 이것이 4월18일 ‘코뮈니케 5호’로 발표됐다. 협상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모스크바 협정을 수락하고, 임시정부 수립의 방법·구성원·기능에 관한 공위의 결정을 준수한다고 서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수적 정당 사회단체들은 이것을 거절하거나 서명하더라도 반대 의사를 표시할 자유를 요구했다. 소련은 그런 조건부 서명은 기만이라며 거부했다. 신탁통치를 주장했으며 또 타협안까지 내놓은 당사자로서 좌파만을 상대로 협의한다는 데 동의할 수 없었던 미국은 곤란해졌다. 결국 제1차 공위는 깨지고 말았다. 깨진 직접적 원인보다는 46년 들어서 두 나라 사이의 불신이 커졌기 때문이었다고 믿어진다.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은 이제 막 개시된 ‘냉전’ 때문에 좌초된 것이다. 46년 5월 중순 우리는 이런 정세 속에서 귀국선을 타고 상하이를 출발했다. 우리가 탄 배는 미국이 제2차 대전 때 대량생산했던 엘에스티(LST) 수송함이었다. 아래층 선창 중간에 미리 배정된 자리에 우리 가족이 들어갔다. 상하이에서 함께 지냈던 창강 아저씨네 네 식구와 우리 세 식구가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우강 최석순 선생의 가족이 있었다. 약산 김원봉의 재혼 부인인 그의 장녀 동선씨는 돌도 안 된 아기를 데리고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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