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21일 광주 도청 앞 금남로 일대에서 탱크를 앞세운 공수부대 진압군과 시민 시위대들이 대치하고 있다. 그날 밤 군대를 물리치고 도청을 접수한 시민들은 마침내 항쟁 지도부를 꾸린다. 정현애·김상윤 부부의 녹두서점은 사진 오른쪽 건물들 뒤쪽 구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 ① 정현애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30돌을 맞아 ‘오월을 지켜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때 그순간 그자리에 있었던 여성들부터 그날 이후 지금까지 ‘5월의 상처’를 떠안고 보듬어온 여성들, ‘5월 정신’을 잇고자 애쓰는 젊은 후예들까지, 평범한 여성들의 특별한 체험과 기억들을 통해 파란과 격정의 민주화운동사, 그 절반을 채워온 여성사를 발굴하고자 한다.
‘정현애, 녹두서점 안주인, 광주항쟁 지도부 여성대표.’ 지금 그의 이름을 이렇게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광주지부 지회장, 광주광역시 시의원 등으로 친숙하다. 그러나 1980년 5월의 기억 속에서, 그의 삶의 이력에서 무엇보다 먼저 쓰여야 할 이름은 광주항쟁 지도부 여성대표다. 5월항쟁 당시 가족이 함께 참여한 사례를 꼽는다면 정현애의 가족이 대표적이다. 남편(김상윤)은 5월17일 밤 예비검속 수감자로, 아내인 그는 항쟁 지도자로, 시동생(김상집·예비역)은 시민군으로, 시누이(김현주·양서조합)와 여동생(정현순·회사원)은 참여자로, 두 집안 5명이 모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그해 5월18일 피로 물든 광주시의 한복판, 금남로 안쪽 도청에서 5분 남짓거리에 사회과학 책방인 ‘녹두서점’이 있었다. 녹두서점은 정현애의 단칸 신혼방이면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기지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암울한 시대에 대한 울분을 토하고 나누며 위로받았다. 당시 삼계중학교 교사였던 정현애는 낮에는 학교 일을, 밤에는 민주화운동가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고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는 보석 같은 기쁨의 시간”이기도 했다. 5월17일 밤 전두환 군부의 계엄선포로 광주지역의 민주인사들과 대학생 지도자들이 줄줄이 예비검속되자 녹두서점은 서로의 안위와 정보를 주고받는 공간으로, 활동거점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이어 5월18일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이 시작됐고 바로 서점 앞에서도 자행됐다.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무차별 곤봉세례에 피투성이로 쓰러지고 끌려갔다. 20일 언론은 급기야 이들을 폭도로 매도하기 시작했고 시민들은 녹두서점 뒤편에서 몰래몰래 화염병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력도 없는 화염병만으로 탱크를 앞세운 진압군대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21일 낮 12시, 야만적인 발포가 감행되자 항쟁을 이끌던 사람들도 서점 문을 닫고 피신하기로 했다. 정현애도 부모의 강권과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피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는 “역사 교육자”로서 끝내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전 재산 20만원을 털어 소식지(훗날 ‘투사회보’) 제작기금으로 내놓고 서점을 계속 열어두었다. “이곳마저 없다면 연결망이 끊기는데….” 활동가들을 먼저 피신시키고 여동생과 함께 빠져나왔던 그는 몇 시간 만에 “혼자서라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돌아왔다.
정현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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