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이 목숨 걸고 도피와 밀항을 도운 ‘5·18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은 93년 귀국해 ‘5·18기념사업회’를 만들어 항쟁 정신 계승에 매진하다 2007년 6월 폐질환으로 길지 않은 삶을 마쳤다. 그해 6월30일 영결식 행렬이 광주 금남로 옛 전남도청에서 노제를 지내고 있다.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 ⑤ 김은경
마흔 넘어 목회자의 길
“오월 노래 올해 재녹음” 또 눈물을 쏟는다. 백번 천번을 겪어도 5월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이 벌렁이고 울컥해진다. 김은경 목사는 ‘5월 광주와 윤한봉’의 이름이 나오자 연방 눈시울을 붉힌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아프게 하는 것일까. 김은경은 전남여고 시절 <씨알의 소리>에 글이 당선되면서 함석헌(1989년 작고) 선생을 만났다. 그것이 부러울 것 없이 곱게 자란 ‘소녀’를 거친 바다로 이끌어간 인연이 되었다. 그림도 곧잘 그렸고 공부도 잘하던 김은경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각별했다. 그러나 딸은 그런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함석헌 선생의 수행비서를 자원하고 나섰다. 그렇게 시작된 기독교청년운동은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와 송백회 활동으로 이어졌고, 뒤늦게 한신대에 입학한 그는 송백회의 수배자 은신처 마련과 기금모금 등을 위해 서울과 광주를 잇는 고리 구실을 했다. 그래서 1980년 5월18일 당시 김은경은 광주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광주와 함께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5·18’은 광주에서만 시작되고 광주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은경에게 5월항쟁은 정작 광주에서 상황이 끝난 이후부터 시작됐다. 5월23일 내란음모죄로 현상수배된 윤한봉이 81년 4월 마산부두에서 밀항선을 타고 미국으로 망명하기까지 11개월 동안 그는 윤한봉의 수호천사로 헌신했다. 5월17일 밤 계엄군의 예비검속을 피해 나주로 갔던 윤한봉은 항쟁 기간에 봉쇄된 광주로 끝내 들어오지 못한 채 도피의 길로 나섰다. 김은경은 그와 광주를 잇는 연락병이자 거처와 자금을 공급하는 지원병이었다. 수배자 뒷바라지는 당사자 못지않게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윤한봉을 만나러 갈 때는 몇 번씩 버스를 바꿔타고 왔던 길을 빙빙 돌아 미행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김은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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