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22일 도청을 장악한 시민군과 시 외곽으로 물러난 계엄군 사이에 곳곳에서 무장충돌이 빚어지면서 광주시내 병원마다 사상자들이 밀려들었다. 치료를 위한 피가 모자란다는 소식에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헌혈에 나섰다. <오월, 민주주의의 승리>(5·18기념재단 펴냄) 중에서 황종건
계엄군 눈 피해 환자로 위장
야전병동 일화 생생히 기억
야전병동 일화 생생히 기억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 ⑥ 오경자 1980년 5월, 오경자(당시 40살)는 조선대부속병원 간호부장이었다. 5월18일 0시 계엄 확대 직후 조선대병원은 공수부대에 접수됐다. 이른바 ‘충정작전’에 따라 전국 주요 대학에 계엄군이 진주한 가운데 조선대 체육관과 종합운동장에는 7공수여단 35대대가 주둔했다. 이후 학교는 시위시민 집단수용소이자 폭력과 비명이 끊이지 않는 고문훈련소로 돌변했다. 부속병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병원의 직통전화까지 공수부대가 차지한 상태였다. 그러다 돌연 긴급상황이 발생했다. 공수부대 진입 사실을 모른 채 병원 쪽으로 난 지름길을 따라 도청으로 나가려던 조선대 학생 30여명이 총격을 피해 병원으로 쫓겨들어온 것이다. 마침 병실 순회 중이던 오경자는 학생들을 재빨리 입원실로 숨게 했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은 병원 안으로 마구 총을 쏘아댔고 심지어 입원실까지 들어와 총을 겨눴다. 간호사와 환자들은 이심전심으로 학생들에게 환자복을 갈아입히고 포도당 주사까지 꽂아놓는 재치를 발휘했다. 그에게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 환자들이 있다. 휴교령으로 내려왔다는 한양대 학생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계림시장에 물건을 사러 나왔다가 최루탄 연기 속에 헤매고 있는 시각장애인 할아버지를 부축하려던 순간 의식을 잃었다. 공수부대원의 대검에 다리를 깊이 찔려 피를 철철 흘린 채 조선대 운동장 옆에 버려져 있던 그를 차를 몰고 지나가던 한전 직원이 군인들 몰래 실어온 것이었다. 중위로 기억되는 한 공수부대원을 치료해줄 때였다. 얼굴을 많이 다치고 출혈이 심한 상태여서 군복을 벗기고 들고 있던 총을 한쪽으로 치워놓았는데, 주위에 있던 젊은이들이 그 총으로 그를 쏴버려야 한다며 흥분했다. 도청 앞에서 진압군의 만행을 목격한 이들이었다. 그는 “이 사람도 명령에 따른 것이다. 우리 의료인은 누구라도 치료해야 한다”며 총을 잘 싸서 건네주었다. 그러다 부처님 오신 날인 21일, 증강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살육과 이에 분노한 시민들의 저항이 절정에 이르면서 부상자와 주검들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전남대병원·기독병원·적십자병원 같은 종합병원은 물론이고 시내 개인병원들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그날 저녁으로 시민군들이 도청을 접수하자 정부는 광주를 봉쇄한 채 병원을 닫도록 지시했으나 광주시의사회는 ‘부상 시민들을 포기할 수 없다’며 버텨 끝까지 모든 부상자들을 무료로 치료했다. 최근 광주시의사회에서 조사한 당시 병·의원 진료기록을 보면 항쟁기간 동안 환자 수는 모두 858명이다. 하지만 혼란 중에 기록하지 못한 부상자도 많았고 무엇보다 신변 보호를 위해 환자 수를 10분의 1 정도로 줄여 보고했다고 당시 의료진들은 증언한다. 오경자는 그때 야전병동 상황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일화들을 또렷이 기억한다. <광주문화방송> 건물이 불타던 밤 다리에 총상을 입은 시위학생을 부축해 왔던 경찰, 구급차가 불타버리자 트럭으로 부상자를 실어 나른 운전기사들, 총을 맞아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부상자에게 30병 이상 수혈을 했는데도 모자라자 기꺼이 팔목을 내밀던 간호사와 의사들, 대중교통이 멈추자 12시간을 걸어서 출근해 병원을 지킨 1000여명의 직원들, ‘환자들을 굶길 수 없다’며 밥 반그릇 먹기운동을 펴던 식당직원들, 환자용 산소며 쌀이며 부식거리며 자발적으로 구해다 주던 시민군들 등등등. 그러나 그는 40년 간호사 생활에서 가장 끔찍한 참상도 그때 겪었다. 5월27일 새벽 도청 진압작전이 끝난 직후 그는 계엄군의 요청으로 파견된 의사들에게 검안 도구를 전하려고 도청으로 갔다. 그리고 화단과 구름다리 주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시민군의 주검들을 목격했다. 교련복, 검은 운동화, 하얀 러닝셔츠, 얼굴만 가려놓은 신문지…. 그도 의사들도 구급차 기사도 그날 이후 한동안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잠도 못 자고 앓아누운 이들도 있었다. “적도 아니고 원수도 아닌데, 무고한 사람들이 저런 모습으로 죽어가야 하는가….” 그 후 30년, 올해 고희를 맞은 그는 새삼 참 간호의 본질을 깨닫는다. 아픈 사람 돌보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을 병들게 하는 사회문제와 환경에도 “늘 썩지 않도록”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료인으로서 국민으로서 여성으로서 남은 바람이 있다면, 어떤 이유로도 서로 생명을 살상하는 그런 일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지요.”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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