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남일
[한겨레가 만난 사람]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소설가 김남일
30년 전 일어난 광주민주화운동은 한국문학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수많은 작가들이 운동의 대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문학을 바쳤다. 날카로운 재능과 따뜻한 가슴도 민중과 해방의 이름으로만 문학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시대의 제단에 헌신한 많은 이들이 30년 세월의 굴절 속에 무참히 잊히기도 했다. 갓 데뷔한 젊은 소설가로, 1980년대 민족민중문학 진영의 중심이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훗날 민족문학작가회의이며 현 한국작가회의)의 핵심 일꾼으로 활약한 소설가 김남일(53·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씨를 만난 것은 그런 역사의 무정함과 문학의 길에 대해 이야기해보기 위함이었다. 애초 인터뷰는 ‘5월 광주’ 이후의 문단 풍경을 무겁지 않고 즐겁게 회상해보자는 취지였는데, 결국 대화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자의 무덤가를 스산히 거니는 분위기가 되었다. 고 채광석, 고 김남주 그리고 이 땅의 수많은 무명시인들에게 영광 있기를. 80년대 ‘자실’ 산증인, MB 문화정책 비판 앞장
“그땐 모두가 전사…시대가 운동하게 만들어” -광주항쟁이 발발한 지 어언 30년이 되었습니다. 5월 그때 우리 문학은 어디쯤 있었을까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떠오릅니다. 광주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피흘리며 죽어갔을 때, 너는 어디에서 뭘 했느냐는 원죄의식, 그 마음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채의식이 80년대 내내 깊은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을 남깁니다. 많은 문학인들, 문청(문학청년)들이 그렇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가슴에 담고 한국 문학사의 중심으로 하나둘 모여들어 80년대 민주화운동의 바다로 합류해 갔습니다.” -당시 공개적으로 ‘광주사태’가 언급되기 시작한 건 항쟁 발발 후 4~5년이 지나서부터가 아닌가 기억되는데요. “80년대 초반까지 ‘광주사태’는 금기어였습니다. 함부로 입밖에 냈다가 어떤 곤욕을 치를지 모르고, 침묵할수록 죄의식도 깊어지는. 문단에서도 ‘광주’를 터놓고 이야기하기 시작한 건 84년 12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이하 자실)가 재건되면서부터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작가들이 대거 운동의 일원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죠? “그렇습니다. 대학에선 유화국면이 전개돼 학생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고, 국민들 사이에서도 전두환 정권에 맞서기 위한 에너지가 재야를 중심으로 결집되기 시작했습니다. 자실이 만들어져 처음 한 일도 문학이 아니라 선전이었습니다. 광주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활동 말입니다.” -작품 활동은 거의 못 했겠네요.(웃음) “소설은 아직 이르지만, 시는 82~83년께부터 전국적으로 동인지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좋은 작품들이 많아 나왔지요. 제가 자실 기관지인 <실천문학> 3호부터 편집장을 했는데 신인 발굴 투고자 명단을 몽땅 실었습니다. 나중에 등단한 분들에게 ‘창피하게 그런 걸 싣냐’는 핀잔 아닌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저는 투고자 모두를 동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엄혹한 시기에 자기 이름 석자 값으로 감옥 갈 각오가 돼 있는. 비록 당선자는 아니지만, 그들의 이름을 역사에 기록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광주는 많은 순수 문학도를 혁명의 선전가로, 전사로 변신시켰습니다. 문학을 통해 혁명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봇물처럼 쏟아졌습니다. “나중에 문학평론가가 된 친구가 ‘아무리 인간을 빵으로 규정한다 해도 문학만은 아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온 게 기억납니다. 당시는 이미 죄르지 루카치의 마르크스주의 미학이론이 상당히 유행하던 때였지만, 그는 끝까지 문학만은 순수의 영역에 남기를 바랐던 거지요. 그런데 그렇게 망설이고 머뭇거리던 친구가 나중엔 나보다 더 앞서갑디다. 루카치 평전도 번역하고. 허허.” -자실의 산증인으로서 80년대 한국문학사가, 나아가 대중들이 꼭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문인이라면 누가 있을까요? “저로서는 누구보다 고 채광석 형입니다. ‘광주’의 충격으로 인한 실어증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수많은 전국의 문청들을 불러모으고, 문단의 선후배들을 하나로 아울러서 80년대 민족민중문학 진영을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으로 이끈 인물입니다. 비록 대중들의 기억 속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채광석(1948~1987)이 시인, 문학평론가로 문단에서 활동한 기간은 3~4년에 불과하다. 충남 안면도 태생으로 서울사대 재학시절 학생운동으로 옥살이를 한 그는 신용협동조합에 근무하던 83년 35살의 늦깎이로 등단해 자실 재건을 주도하는 등 87년 6월항쟁기까지 민족민중문학 진영의 핵심 조직가·운동가였다. 6·29선언으로 민주화운동 진영이 한껏 승리의 기분에 젖어 있던 7월12일 새벽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39살의 짧은 생애였다. “그때 세브란스병원 영안실 풍경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운동 진영의 거의 모든 문화예술인들이 모였는데, 특히 그를 아는 문인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한쪽에선 통곡소리가 낭자하고, 한쪽에선 정치인들이 보낸 조화를 부수며 광란하고, 누군가는 선배 멱살을 잡고 흔들며 당신들이 죽였다고 울부짖고. 또 한쪽에선 ‘임을 위한 행진곡’이 유장하게 흐르고…. 그를 잃은 슬픔으로 밤조차 미친 듯이 저물던 그날이 우리 현대문학사가 간직한 가장 절통하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채광석은 어떻게 문단의 조직가가 되었나요? “그는 대단한 욕쟁이요 독설가였습니다. 걸고 기발한 욕설로 문단의 아래위를 한 줄로 엮고 그 카리스마로 전국의 문인들을 리드했습니다. 한창땐 도처에서 꾸역꾸역 사람들이 채광석 이름 하나 들고 찾아오는데 다 자기들이 시인이래요. 하긴, 마포경찰서 건너편 자실을 찾아오는 것만도 용기가 되는 시절이었으니, 스스로 시인이라는데 누가 그걸 시비하겠어요? 그러고 조금 지나서 작품을 들고 오는데, 알고 보면 사실 그게 데뷔작이에요, 뻔뻔하게.(웃음) 하지만 다들 참 잘 썼어요. 그들이 등단하는 데 시간을 허비했더라면 그 무렵 우리 문학은 오히려 왜소해졌을 겁니다. 더 많이 풍성해지고 더 많은 싸움의 동력을 얻게 된 거지요. ‘야, 이 잔바리들아, 힘내! 힘내서 쓰고 또 써! 이 꼴 보자고 싸운 건 아니잖아, 안 그래?’라고 웃으며 소리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시인으로서는 누가 기억나나요? “김남주입니다.” 고 채광석·정희수…잊혀진 ‘문학청년’들
“5월 광주에 대한 명작, 반드시 나올 겁니다”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을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시 ‘자유’ 중에서) 김남주(1946~1994)는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전남대 영문과에 다니다 유신 반대 투쟁으로 제적됐다. 79년 남민전 사건으로 15년형을 받고 복역하다 88년 12월 9년3개월 만에 석방됐다. 94년 췌장암으로 사망해 광주 5·18 구묘역에 묻혔다. 옥중시집 <진혼가>(1984)를 비롯해 <나의 칼 나의 피>(1987), <조국은 하나다>(1988), <사상의 거처>(1990) 등의 시집이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시인이기 이전에 전사이길 원했다. “80년대 내내 감옥에 있었던 김남주는 많은 이들에게 원죄의식을 대속하는 증거로, 긍지로 빛나는 시인이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그곳에서 굴복하지 않는 정신으로 버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운동의 도덕적 정당성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가 감옥에서 우유팩에 못으로 긁어서 쓴 시들을 읽으며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감동으로 몸을 떨었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시를 보면 정말 강한데, 사람은 예의와 겸손이 몸에 밴 분이었습니다. 시 낭송도 참 뛰어났지요. 어떻게 저런 사람이 이른바 ‘혁명자금’을 모으기 위해 재벌 집 담을 넘어 들어가고 시인보다는 전사로 불리기를 원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마다 그와 맺은 인연의 모습이 다 다르겠지만, 한 가지, 그가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경직된 이념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는 사실만큼은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는 분명히 ‘전사’였고, 그런 만큼 비수 같은 시편들을 남겼지만, 그것들은 결국 그가 ‘찬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시 ‘옛 마을을 지나며’) 소박한 민중의 세상을 꿈꾸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1988년 감옥에서 나와 94년에 별세했으니 세상의 삶을 누린 게 겨우 6년이었습니다. “오랜 옥살이의 후유증이었는지…. 동지였던 분과 결혼해 아들 하나를 남겼습니다. 이름이 토일이었습니다. 4일은 일하고 3일은 쉬는 게 노동자의 좋은 세상이다, 그래서 김토일.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활화산 같은 유언을 남기고 갔습니다. 좋은 세상 만들고 싶었는데, 엎어보려고 했는데, 안됐다고.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을까요, 세상에 대한 분노였을까요?” -80년대라는 격랑 속에서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죽음도 많았습니다. 역사란 참 매몰찬 것이란 생각입니다. “정희수(1954~1993)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경남 마산 출신으로 바둑을 잘 두었고 심하게 다리를 절었습니다. 87년 6월항쟁이 벌어지자 누구보다 맨 앞에서 열심히 싸웠습니다. 지금도 환영처럼 기억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는 6월 내내 명동성당에 상주하는 시위대 속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먹고 자고 싸웠습니다. 밤이 이슥해서야 조금 눈을 붙인 그는 동도 트기 전에 어김없이 일어나 안개인지 쓰레기 태운 연기인지 시야마저 희미한 성당 정문께의 비탈길을 절뚝거리며 내려갑니다. 그리고 깨진 보도블록을 냅다 던지면서 소리칩니다. ‘전두환, 이 ×××야 나와라!’ 전경들도 죽을 맛이었을 겁니다. 새벽마다 잠도 못 자게 하는 그 인간, 다리까지 몹시 절뚝거리는 그 인간이 미웠을 겁니다. 그는 편견과 장애와 지독한 궁핍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집 <서울의 양심>을 냈지만, 지금은 절판돼 기억하는 이도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을 기억해줄 아무런 사회적·인간적 자산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해 6월 그가 보여준 싸움은 그것 자체로 ‘5월 광주’가 우리에게 남긴 아름다운 한편의 시였습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1989년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90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투쟁’에 지친 젊은이들의 눈길을 조금씩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91년 노동자 시인 박노해가 붙잡혔고 94년 통일운동의 상징적 존재였던 문익환 목사와 혁명의 시인 김남주가 잇따라 타계했다. 공교롭게도 그해 운동권 출신의 최영미 시인이 쓴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베스트셀러가 됐다. 한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문학운동가로서, 소설가로서 김남일에게 90년대는 어땠나요? 광주의 여진은 계속되고 있었나요? “여진이 아니라 아주 다른 세상이 왔습니다. 저에게 90년대는 퇴각의 시기였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충격은 서태지로부터 왔습니다. 완강한 도덕주의로 무장돼 있던 사람에게 다른 별에서 온 것 같은 서태지 식의 자유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죠. 하지만 결국은 그 속에서 새로운 진보의 길을 보게 됐지요. 그 아이들이 이뻐지고 이윽고 노래도 귀에 들어오고. 나중엔 노란 물을 들인 머리조차 이뻤습니다. 그래, 우리도 한때는 장발에 나팔바지였다, 그렇게 나의 상처난 가슴에도 조금씩 새살이 돋기 시작하더군요. 허허.” -30년의 세월, 작가로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은? “서경식 선생이 그랬나요? 지배층의 서사에 대항해서 억압받는 자의 서사를 발굴해내는 게 지식인의 임무라고. 하지만 이제 그 짐도 내려놓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건 문학이었으므로. 그런데 시대가 문학이 아니라 운동을 하게 했잖아요?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결국 작가에게는 작품입니다. 광석이 형 추모비를 세운 게 우리지만, 지금은 우리조차 찾아가지 않잖아요? 작가라면 억울해할 일은 아니라는 걸 우리도 압니다. 문학적 성취가 없다고 그 사람을 부정할 수 없고 부정해서도 안 되지만, 대중과 문학사가 기억하는 건 문학운동이 아니고 문학작품인 것을.” -광주항쟁도 이제 역사 속으로 진입할 만한 시간적 거리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에겐 이렇다 할 명작이 없습니다. 언제쯤이면 문학적으로 승화한 5월 광주를 읽게 될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가, 작가들이 시대의 격랑 속에서 참 힘들었나 봅니다. <토지>나 <무기의 그늘> 같은 작품이 나올 만도 한 세월인데…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 걸까요? 그래도 반드시 나오긴 나올 겁니다.” 이렇게 말해놓고 그는 또 한국작가회의가 문화체육관광부의 졸렬한 문화정책 때문에 시작한 ‘저항의 글쓰기 운동’을 나가기 위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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