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피난길 잠복 계엄군 총에 두 눈 앗긴 엄마

등록 2010-05-17 18:38

1980년 5월18일부터 계엄군의 무력진압으로 죽거나 다친 시민들이 속출하면서 광주시내 병원들은 야전병동처럼 환자들로 넘쳐났다. 항쟁 이후 정부가 인정한 부상자만 4000명이 훨씬 넘는다. 
 <오월, 민주주의의 승리>에서 황종건
1980년 5월18일부터 계엄군의 무력진압으로 죽거나 다친 시민들이 속출하면서 광주시내 병원들은 야전병동처럼 환자들로 넘쳐났다. 항쟁 이후 정부가 인정한 부상자만 4000명이 훨씬 넘는다. <오월, 민주주의의 승리>에서 황종건
총격에 놀란 딸 구하려다 부상
살 길 막막해 한때 죽을 결심도
“죄지은 사람들 참회해야 마땅”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
⑫ 강해중

강해중(77). 1980년 5월20일 오전 8시, 광주 시내의 고등학교에는 일제히 휴교령이 내렸다. 도청 일대의 금남로와 충장로, 노동청 방면에서는 여전히 수만명의 시민들이 ‘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계엄군과 사흘째 대치중이었고, 시내 전반에는 태풍 전야와도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옥죄고 있었다. 당시 6남매를 둔 평범한 주부였던 그는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그의 집은 도청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학동에 있었다. 18일부터 며칠째 시내 쪽에서 총소리와 함성소리가 들려와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31사단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는 큰아들 걱정이 앞서기도 했지만 ‘난리통’에는 군인 신분이 오히려 안전할지도 몰랐다. 더 큰 걱정은 학교를 다니고 있는 두 아들과 딸이었다. 혹여 시위 물결에 휩쓸려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수선한 시국이었다.

“너희 형은 시방 나라에 매인 몸이어서 어쩔 수 없이 저 거리에다가 세워둬야 허지만 너희들은 안 된다. 형제간에 싸울 일이라도 있다냐. 내일 당장 화순의 외가로 내려가자.”

그는 아이 셋을 데리고 23일 아침 길을 나섰다. 교통편은 이미 끊어져 걸어서 동구 주남마을 뒤쪽 너릿재를 넘어야 했다. 그의 가족처럼 광주를 빠져나가려는 피난민들이 많아,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무섬증을 서로서로 달래며 마냥 걸었다. 그렇게 얼마쯤이나 갔을까. 너릿재로 막 접어들 무렵 버스 한 대가 경적을 울리며 다가왔다. 유리창이 대부분 깨어져 나간 시위대의 차량이었다. 차 안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몇몇의 젊은이들이 어깨에 총을 멘 채 타고 있었다. 갑자기 총소리가 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와 아이들은 길섶의 보리밭에 뛰어들어 몸을 숨겼다. 매복한 계엄군의 총격으로 버스에 타고 있던 젊은 학생들은 모두 죽은 듯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주변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들리고 흙먼지가 일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피하라고 소리쳤다. 두 아들은 화순과 광주 쪽으로 각각 뛰어갔다. 그러나 둘째딸은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로 얼어붙은 듯 땅에 엎드려 있었다. 어떻게든 손을 써야겠다 싶어 막 딸을 향해 몸을 일으킨 순간, 무언가가 그의 얼굴을 강타했다. 엄청난 충격에 마치 머리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 부지불식간에 얼굴을 쓸어올린 손은 이미 피투성이었다.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잃었다.

강해중은 25일 아침에야 눈을 떴다. 총을 맞고 쓰러진 뒤 이틀 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양쪽 눈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나마 아이들이 다치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은 다행이었다.


이제 눈이 멀었으니 내 몸도 추스르기 어렵겠구나, 커나가는 아이들은 또 어찌할 것인가, 살아갈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앞을 보지 못한다는 절망감과 가족들에게 짐만 될 것 같은 자괴감에 그는 병원 식사를 거부하며 굶어 죽을 작정도 몇번이나 했다.

그러나 비극은 계속됐다. 시집간 큰딸이 그를 돌보는 사이 외손녀가 그만 화장실에 빠져 죽은 것이다. 그 후유증으로 큰딸은 이후 아이를 갖지 못했다. 3년 뒤에는 남편(서판오)마저 신경성 고혈압으로 쓰러져 십여년을 고생하다 97년 먼저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하지만 가족들의 변함없는 사랑과 꾸준한 신앙생활이 절망의 구렁텅이로부터 그를 구했다.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된 만큼 나 역시 조금이라도 남을 위해 살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점자를 익히는 한편, 항상 밝은 모습과 긍정적인 사고를 보여주려고 애쓰면 살아왔다.

90년 당시 노태우 정권은 ‘5·18 학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여론을 무마하고자 ‘광주 피해자 보상법’을 일방통과시켰다. 그 역시 당시 보상금을 받았으나 그동안 치료하느라 쌓인 빚을 갚는 데 고스란히 들어갔다.

2002년에는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보상을 해줬다는 이유로 연금도 없다. 그에게 “허울뿐인 유공자 지정은 차라리 모욕”이다.

자신에게 빛을 앗아간 ‘5·18’을 강해중은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그날의 일은 제 운명이라고 여겨야 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구하는 자에게만 용서를 내릴 것으로 생각하지요. 5·18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혔어요. 마땅히 죄를 지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참회해야 합니다.”

정리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비상계엄 전 국무회의 열렸나?…장관들 참석 여부 함구 1.

비상계엄 전 국무회의 열렸나?…장관들 참석 여부 함구

[단독] ‘충암파’ 이상민, 어제 오후 울산 회의 중 급히 서울행 2.

[단독] ‘충암파’ 이상민, 어제 오후 울산 회의 중 급히 서울행

조선 “계엄은 자해” 중앙 “자폭” 동아 “괴물”…보수신문도 경악 3.

조선 “계엄은 자해” 중앙 “자폭” 동아 “괴물”…보수신문도 경악

[단독] 검찰 내부망에 “계엄, 직접수사 범위인 직권남용죄” 4.

[단독] 검찰 내부망에 “계엄, 직접수사 범위인 직권남용죄”

류혁 법무부 감찰관, 계엄 반발 사의…“윤 대통령, 내란죄 해당” 5.

류혁 법무부 감찰관, 계엄 반발 사의…“윤 대통령, 내란죄 해당”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