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현(70) 신부
연재 시작하는 ‘길 위의 신부’ 문정현
5대째 천주교 가정…‘순교 각오’
인혁당 사건 계기 35년간 투사로
“인간성 지키는 존재로 남고파” 그를 만나려면 언제나 그렇듯 현장으로 가면 된다. 1966년 사제의 길로 들어선 지 42년 만인 2008년 공식 은퇴를 했지만, 그는 여전히 현장을 지키고 있다. 지난 27일에도 그는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의 뙤약볕 아래서 ‘4대강 사업 반대 단식기도’ 사제단과 함께하고 있었다. <한겨레>의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7번째 주자인 문정현(70·사진) 신부다. 그가 스스로 붙인 회고록의 제목은 ‘길 위의 신부’다. “사람들은 나더러 길 위의 신부, 깡패 신부, 빨갱이 신부, 혹은 광대라고들 하지. 누가 뭐라고 하건 나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땅의 사람들, 민중과 함께 길 위에 섰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이며 사제야. 그래서 ‘길 위의 신부’가 나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인 것 같아.” 1940년 전북 익산의 5대째 천주교 가정에서 4남3녀 중 둘째로 태어난 그에게 사제의 길은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들어선 ‘운명 같은’ 것이었다. 누이동생(문현옥)은 수녀로, 그 아래 남동생(문규현)도 신부로 같은 길을 걷고 있을 정도로 그의 집안은 신심이 깊다. “외할아버지가 어린 나를 품에 안고 <경향> 잡지를 늘 소리내어 읽으셨는데, 순교자들 이야기를 읽을 때면 늘 우시더라고. 그래서였는지 6·25 때도 그랬고, 70년대 박정희 독재와 싸울 때도 당연히 ‘순교’할 각오가 서더라고.” 그가 그 고난의 길에 첫발을 디딘 곳도 바로 명동성당이었다. 74년 7월 일본에서 귀국하던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김지하 시인과 민청학련 사건’ 관련 혐의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전주에서 명동성당으로 급히 올라온 그는 그곳에서 우연히 인혁당 사건 가족들을 만나 억울한 사연을 듣게 됐다. 이듬해 4월 인혁당 대법원 판결 때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변호사의 통역으로 참관한 그는 바로 다음날 새벽 전격 사형을 집행한 뒤 주검마저 가족들 몰래 빼돌리려는 경찰에 맞서 장의차 밑에 드러누우며 싸웠다.
“76년 3·1 구국선언 때 결국 잡혀가서 재판을 받는데 김수환 추기경께서 놀리는 거야. 다른 피고들은 논리정연하게 재판관을 꾸짖는데 우리 신부님들은 왜 소리만 치느냐고. 그때부터 창피해서 역사 공부를 열심히 했지”, “79년 10·26 때 홍성교도소에 수감중이었는데 갑자기 삼엄해지는 게 언제 끌려나가 죽을지 몰라 처음으로 겁이 나더라구. ‘죽더라도 당당하게 가자’ 묵주기도로 버텼지.” 하지만 그길로 35년 그는 늘 가장 낮은 곳, 고통받는 이들과 “현장에서, 몸으로!!!” 함께했다. 70년대 반독재 인권운동, 80년대 민주화와 노동자·농민운동, 90년대 통일운동…. 가장 최근엔 ‘용산 철거민 희생자’들과 꼬박 1년간 남일당을 지켰다. “세대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싸움의 주제는 늘 달랐지만 내게는 모두 같은 뿌리야. 성서에 이르길, 사람이든 자연이든 모든 관계는 ‘봉사와 수호’라 했어. 주종이 아니라 공존이야. 그걸 파괴하는 세력에 맞서 싸우는 것이 내 소명이니까.” 그런 까닭에 그에게는 ‘겁없는 투사’의 거친 인상이 따라다닌다. 하지만 가까운 지인들에게 그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할아버지’, ‘컴퓨터와 카메라를 잘 다루는 디지털 달인’ 등 전혀 다른 친근한 면모로 인기가 많다. “지난해부터 회고록 구술을 하면서 새삼 내 삶을 돌이켜보니 성서에서 건진 이 한마디가 떠올라. ‘남은 자’(remnant). 정권이 바뀌고 시절이 바뀔 때마다 편한 길로 이탈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나를 지키자, 죽을 때까지 내 정체성을 변치 말자’ 기도해왔어. 인간성과 공동선을 지키는 존재로 남자.” 그가 회고록 독자들에게 전하고픈 ‘삶의 원칙’이다. ‘길 위의 신부’는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작가 김중미씨의 구술정리로 새달 1일부터 연재를 시작한다. 글·사진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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